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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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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전략과 강점 활용으로 전승 신화를 만든 이순신 장군

 

한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를 가장 많이 꼽을까?” 아마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가장 많이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 여러 과학 발명품들을 만들도록 하는 등 치적이 뛰어나지만, 왕이라는 직위에서 행한 업적들이 많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롤 모델로 삼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 지도층 내지 기업 리더들이야 세종대왕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 많을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세종대왕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본받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공적에 비하면 출신도 너무나 평범하고 알고 보면 타고난 자질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는 면에서 일반인들이 롤 모델로 삼기에 적합하다.

이순신 장군은 무신이었을까, 아니면 문신이었을까?” 물론 장군이라는 칭호가 붙었으니까 당연히 무신이라고 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응시했던 것이 아니라 문과에 응시했었다고 한다. 문신이 되기 위해 수차례 과거 시험을 봤으나 계속 낙방하였다. 그런데 나이도 차고 더 이상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서 주위의 권고로 무과 시험을 보고 무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주장은 이순신 장군이 무과 시험을 치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에서도 뒷받침된다. 옛날 읽었던 위인전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무과 시험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부목을 댄 다음 다시 말에 올라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과거에 합격했다고 미화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이순신 장군이 애초 무과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과거 시험 중 말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문과 시험을 준비하자가 급하게 무과로 전환했기 때문에 충분히 말 타는 연습을 못해서 말에서 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 장군은 문과를 포기하고 무과로 과거에 급제하는 길을 택한 것일까? 조선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의해 건국된 나라다. 즉 무신 반란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뜻이다. 더구나 고려 말기에는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된 무신정권은 자손들에게 그 권력이 이어지는 상태를 유지하다가 1258년 최충헌의 증손자인 최의가 살해될 때까지 거의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고려가 멸망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무신들의 득세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성계는 왕의 자리에 오른 후 무신들이 득세할 경우 언제 다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문신들을 우대하고 무신들은 천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같은 직급이더라도 무신보다는 문신들의 권력이 더 셌고, 무신들은 되도록 왕궁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하고 변방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는 글께나 읽는 선비들은 문과를 선호하게 되어 무신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무신들은 당연히 글보다는 싸움 그 자체에 능한 사람들만의 차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순신 장군도 무신보다는 문신이 되기를 원했을 테지만, 문신이 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어쩔 수 없이 무신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문과에 합격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당시 부패했던 과거 제도의 탓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문과에 무난히 합격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합격한 다음 변방에 배치되어 근무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수군에 편입되었다. 사실 변방에서 국경만 지키는 경우에는 싸움만 잘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즉 전투에는 글을 잘 읽는 능력보다는 싸움을 잘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 만약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순신 장군은 그저 평범한 무관으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무신들이 단순히 변방만 지키거나 성문 보초를 서거나 시키는 임무만 수행하는 경우에는 싸움만 잘 하는 능력만 가졌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전쟁에서는 싸움을 잘하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작전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더구나 일본의 철저한 전쟁 준비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아군의 강점을 활용하고 적군의 약점을 찌르는 작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래 문신이었기 때문에 병서를 읽고 작전을 짜고 전쟁을 준비할 수 있어서 뛰어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문신이라는 면과 무신이라는 면을 네트워크화 하여 그토록 눈부신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문신으로 과거에 합격했더라면 아마 이름도 없는 평범한 관리가 되어 평생을 보냈을 가능성이 많다. 설사 그가 뛰어난 무술 실력만 갖고 있었더라도 그런 전과는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합격한 후에 북방의 국경 수비대에서의 근무를 시작으로 무신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또 문과를 준비하면서 쌓은 능력까지 보태서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신으로서도 문신으로서도 당시 조선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지만, 무신과 문신의 능력을 네트워크 시킴으로써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네트워크 전략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각 대상 능력이 아주 뛰어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풍전등화의 처지인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전적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한산대첩, 명량해전 등 모두가 알고 있는 큰 전투를 포함해서 크고 작은 전투를 포함하면 2323승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거둔 2323승이라는 전과는 세계 전쟁사에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어느 누구도 깰 수 없는 진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2323승을 거두면 엄청난 일인데(아마 이런 성적을 거둔 팀은 여태껏 한 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물며 전투에서 1패도 없는 2323승을 거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영국이나 미국 등 강대국에서 태어나 이런 전과를 거뒀더라면 세계사에 남는 위인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33척의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 27척의 배로 맞서 거둔 승리 때문에 얻은 넬슨 제독의 명성에 비해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어떤지를 비교해보면 그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구나 넬슨 제독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또 적과 거의 대등한 전력을 갖추고 싸운 데 비해 이순신 장군은 임금과 조정의 견제를 받으며 그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더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한 데도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2323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전과를 얻은 가장 큰 요인은 무신과 문신 능력의 네트워크 전략에 더하여 강점 살리기 전략을 동시에 사용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이순신 장군은 조선군과 일본군의 무기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조선군 무기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은 최대한 피하도록 작전을 짜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무기가 대포와 조총인데 비해, 조선군의 무기는 대포와 활이었다. 조선군은 전투에서 장거리에서는 대포, 단거리에서는 활을 사용했는데, 대포는 일본군에 비해 우수한 반면에 활은 일본군 조총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특히 일본은 긴 내전을 겪으면서 근거리 전투에 능한 반면, 조선군은 실전이 부족해서 백병전에 매우 약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대포의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포를 최대한 활용한 전투를 주로 했다. 특히 조선군의 배는 크고 튼튼했기 때문에 대포를 10여문씩 실을 수 있었고, 대포 발사 시의 반동을 견뎌낼 수 있어서 동시에 대포를 여러 발 발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배는 빠른 반면에 약해서 대포의 반동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대포를 몇 대 실을 수 없었고, 발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배의 수는 일본군이 많았지만, 전체 대포의 수는 조선군이 뒤지지 않았다. 더구나 대포에 맞은 경우에 튼튼한 조선군의 배는 파손이 덜한 반면, 약한 일본군의 배는 파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대부분의 전투에서 펼쳤다는 학익진 대형은 바로 조선군의 대포의 강점을 살리는 전략이었다. 즉 조총의 사거리 밖에 배를 위치시키고, 대포로 먼저 공격을 퍼붓고, 일본군 배가 다가서면 뒤로 물러서면서 그 거리를 유지하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또한 일본군의 배는 빠르기는 하지만 충돌에 약한 약점이 있는 점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대포로 파손 시킨 뒤에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군의 배로 충돌시켜 침몰시켰던 것이다. 어차피 전투의 최종 마무리는 백병전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백병전을 한다면 조선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본군의 배를 파손하고 침몰하는 배에 탄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은 훨씬 더 유리했을 것이다. 더욱이 현대의 총과 달리 조총은 물에 약할 수밖에 없는데, 대포에 의해 튄 물을 뒤집어 쓴 조총을 쥔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더구나 침몰하는 배에 탄 일본군은 이미 기가 한풀 꺾였을 가능성이 컸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홈그라운드라는 강점을 십분 활용해서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점도 전승의 큰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진도 울돌목 전투에서처럼 조수간만의 차와 좁은 지형에 의한 거센 물살을 이용하여 일본군 배를 침몰시켰던 전략은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지만,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전략이었다. 또 이순신 장군은 대부분 전투 장소를 섬과 섬 사이의 좁은 해역으로 잡아서 일본군이 수의 우세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오히려 좁은 해역에 많은 일본군의 배들이 집결하게 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좁혀서 전진과 후퇴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예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대를 뛰어넘어 평범한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공부에 뛰어난 수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문과 재능과 무과 재능을 네트워크화 하여 차별화된 최고 인재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조선군과 일본군의 강점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조선군의 강점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런 강점 발휘 전략 덕분에 조선 수군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전승 행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간에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명을 거역하고 출전하지 않아 좌천되고 잠시 원균이 지휘를 맡아 치른 칠천량 전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군 강점 살리기 전략을 무시한 채 무조건 돌격했다가 대참패를 당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 후 다시 조선 수군의 지휘를 맡게된 이순신 장군은 남은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일본의 배들을 격파한 것도 바로 울돌목의 강한 조류를 이용한 강점 살리기 전략 덕분이었다.

2323승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만 보고 이순신 장군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결코 뛰어난 인재가 아니었다. 만약 수능 성적이 안 좋아서 지방대를 간다고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네트워크화 전략과 강점 살리기 전략을 잘 본받는다면 얼마든지 차별화된 최고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자신의 강점들이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않고 자신의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약점만 생각하고 좌절하는 마음가짐에 있다. 이순신 장군처럼 평범한 자신의 강점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네트워크화 한다면 얼마든지 차별화된 최고 인재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속한 기업 또는 조직의 강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면 틀림없이 이순신 장군처럼 전승 신화를 창조하는 차별화된 최고 인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