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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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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광한루원에 밤이 깊었다. 하늘의 달이 지상에 투영된 공간에서 광한루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연못에 달도, 나도 떠 있다.왼쪽에서 세 번째 기둥일 터다. 몽룡이 서쪽을 바라보며 기대어 실성한 듯 외쳐댄 곳이. “저기 저 건너 운무중(雲霧中)에 울긋불긋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사람이냐, 신선이냐? … 나 보기에는 아마도 사람이 아니로다. 천년 묵은 불여우가 날 호리려고 왔나 보다!”(‘교주 남원고사·校註 南原古詞’, 정길수 교주, 알렙, 2024) ‘청천(晴天)에 떠 있는 송골매도 같고, 석양에 나는 물 찬 제비도 같은’ 춘향이 그네 뛰던 곳은 오작교(烏鵲橋) 곁이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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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누각 기둥 서쪽으로 오작교가 보인다. 몽룡이 이곳에서 지켜보던 그때 춘향은 저쪽 어딘가에서 그네를 탔을 터다.전북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만큼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엮여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장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광한루에 올라 춘향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춘향은 현재의 연인일 수도 있고, 짝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첫사랑의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판소리 한 마당, 소설 한 편으로 이 같은 정념을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다. 광한루 마루에 앉아 눈앞의 연못 연지(蓮池)를 바라보니 그건 아무래도 달(月)인 듯하다.

● 달을 품은 도시, 남원

 

남원은 광한루라는 달을 품은 도시다. 광한루로 대표되는 광한루원은 사실 달을 땅에 투영한 것이다. 조선 세종 시절 전라관찰사 정인지가 광한루에 올라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예 아니더냐”고 한 데서 모든 게 시작됐다. 중국 당나라 현종이 달의 서울에 있는 궁전(월궁)에서 선녀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때 보니 현판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는 전설에서 따온 말이다. 황희 정승이 서울을 못 잊어 붙였을 법한 이름 ‘광통루(廣通樓)’가 달을 뜻하는 광한루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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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연못 연지에 조각배 한 척 떡 있다. 연지는 은하수를 상징한다.이후 400여 년간 후손들이 한 일은 천상을 상징하는 달의 요소를 하나씩 보태는 일이었다. 광한루원 앞 섬진강 지류 요천(蓼川)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지는 은하수였고, 홍예문(虹霓門) 네 곳을 아래에 둔 돌다리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만나는 오작교였다. 연못에 송강 정철이 만든 자그마한 인공 섬 3개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따서 봉래(蓬萊·금강) 방장(方丈·지리) 영주(瀛洲·한라)의 삼신도(島)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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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연지에 놓인 영주섬 영주각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그의 딸은 명창 황애리 씨다.1970년대까지 광한루 정면에 붙어 있던 현판 ‘계관(桂觀)’은 어떤가. 월궁에 있다는 계수나무 높은 궁전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 무제가 수도 장안에 만들었다는 관(觀) 이름이기도 하다. 관은 루(樓)와 같다. 훗날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자 이를 지탱하기 위해 중층 계단을 이어 붙이고 지붕을 씌웠는데 이를 월랑(月廊)이라고 한다. 달에 토끼와 같이 산다는 두꺼비를 형상화한 돌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토끼와 경주한 거북이는 광한루 앞 연못에서 오작교를 바라보는 ‘자라돌(鼈石)’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전통적인 정원 유형을 월궁조원(月宮造園)이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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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누간 내부에 걸린 ‘계관’ 편액. 달의 궁전에 있다는 계수나무 높은 집을 뜻하면서 동시에 달을 바라보기에 좋다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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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바라본 광한루. ‘호남제일루’ 현판이 보인다. 오른쪽 지붕을 인 중층 계단을 월랑이라고 부른다.그렇다고 상상 속 달의 공간만은 아니다. 실제로 달을 보는 명승이었다. 계관이 달리 계관이 아니다. 계수나무, 즉 달을 바라보기(觀)에 이만큼 좋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은 광한루원을 돌담이 둘러싸고 있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방은 트여 있었다. 남쪽으로 400년 전 밤나무 울창하던 터에 시장인 율장(栗場)이 섰고, 요천 너머 금암봉 승월대(乘月臺)로 달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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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남쪽 승월대 저 멀리 남원항공우주천문대 돔과 집라인을 타던 춘향타워가 보인다.한국인에게 달은 특별하다. 어머니들은 정화수 떠 놓고 달에 빌었다. 자녀의 건강을, 남편의 장도(壯途)를, 부모의 만수무강을. 연인들은 달을 보며 빌었다. 사랑의 성취를. 달은 나였고 너였고 우리였다.

약 90년 전 한 언론인은 말했다. ‘조선에 루(樓)라는 이름의 유명한 사적 건물은 거의 산 아니면 구릉에 있다. 안주 백상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 다만 광한루는 평탄한 시가지 한가운데 놓여 있다. … 이 모든 루가 자연의 신세를 져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지나지 못하나 광한루만은 자연이 루의 신세를 져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서춘, 조선일보 1936년 8월 4일자) 달리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가 아니다. 그럼 옛 가객들이 ‘달세계’라 부른 청허부는 어디 있냐고? 정문 현판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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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 정령치에서 반달을 보다

달과 가까이 가 보자. 남원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지리산 정령치(峙)다. 해발 1172m 고갯마루에 정령치 휴게소가 있다. 전망대에서 30여 계단을 오르면 남원을 동과 서로 가르는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에 서면 동으로 바래봉과 뱀사골 계곡이, 서로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이 내다보인다. 지리산 주요 능선과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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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령치 서쪽 경개. 천왕봉 세석평전 반야봉 등이 저 멀리 있다.남북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산마루와 산마루를 잇는 선) 생태 축이기도 하다. 과거 길을 내서 끊어져 있던 것을 그 아래로 터널을 뚫어 길을 돌리고 상당히 복원했다. 백두산까지 1300km쯤 남았다고 이정표가 말한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정령치 능선 오솔길에 서니 동쪽은 운해(雲海)로 자욱하고 서쪽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구름이 능선을 넘어가려 애쓰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드론 카메라를 띄워 한쪽 구름바다와 다른 쪽 구불구불 겹친 산들이 어깨를 맞댄 광경을 찍고 싶지만, 이곳은 국립공원이다. 사전 허락을 받을 생각도 못 했다. 아쉬운 마음에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생각한다. 하얀 구름과 푸른 산이 반반이었다. ‘흠, 반달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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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치 고갯마루 능선. 한쪽이 구름으로 가득하다.내려오는 김에 아주 내려오자. 달궁계곡이다. 그래, 맞다. 또 달이다. 원래는 ‘달 궁전’이었는데 궁에 이른다는 뜻의 달궁(達宮)으로 바뀌었다. 삼한시대 궁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높이 1000m를 훌쩍 넘는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산내면 달궁마을에서 이웃한 심원마을까지 약 6km를 물이 흐른다. 심산유곡이다.

가을 단풍도 좋지만, 계곡가에서 바라보는 달빛 또한 운치 있을 듯하다. 계곡 위 도로에 펜션과 식당이 수십 곳.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공간에 식탁들이 늘어섰고, 곳곳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 야밤 음주는 위험하지만 반주 한잔 정도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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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계곡에 해가 기운다. 단풍과 달맞이를 함께하면 더 좋겠다.어머니와 연인만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대작(對酌)하는 달을 벗처럼 여겼다.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서 홀로 술 마신다)/아가월배회(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고)/아무영영란(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는 어지럽다)’(이백 ‘월하독작’ 중에서)

● 달에 가까이 가는 법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살아 있는 화가를 위한 공간이다. 남원 출신 김 화백이 기증한 자신의 대표작들과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미술관 건축 자체가 또 다른 그림 같다. 본관으로 들어가는 낮은 경사의 길 양쪽은 다랑이논 구조다. 논배미 같은 층마다 찰랑찰랑 담긴 물에 사람이 보이고, 건물이 보이고, 달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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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들어오는 길. 양쪽으로 다랑이논처럼 물길이 만들어졌다.미술관 내부 서너 곳에 조명을 어둡게 한 작은 방들이 있다. 밖이 내다보이는 벽 하나는 통창이다. 마련된 벤치에 앉아 야외를 바라보도록 했다. 숲이, 소나무가, 물이 그리고 하늘이 보인다. 밤에는 물론 달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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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내부 작은 방. 통창으로 밖이 내다보인다. 보는 것은 바깥 경치뿐일까.남원은 10월에 3대 축제를 연다. 광한루원을 밤에 볼 수 있는 남원국가유산야행과 흥부제, 그리고 ‘2025남원국제드론제전 with 로봇’이다. 특히 올해는 드론에 열중하는 모양새다. 드론은 날아 달 가까이 올라간다. 드론을 날리는 일은 어쩌면 달이 되어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중국 전설에서 달에는 선녀 항아(姮娥)가 산다. 상아(嫦娥)라고도 한다. 중국은 2004년부터 달 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해 2013년 세계 세 번째로 탐사선을 달에 착륙시켰다. 그 프로젝트 이름이 ‘창어(상아·嫦娥의 중국어 발음)’다. 지금 남원에서 날리는 드론에 그런 웅대한 꿈이 담겨 있길 달에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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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19일 남원에서 열린 ‘2025남원국제드론제전 with 로봇’ 행사장. GNC21 제공

글·사진 남원=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동아일보 2025년 11월 1일]

내려다보니 물이었다.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그곳 제천(堤川)에서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다. 남한강이 허리를 감아 돌긴 하지만 지금 산들은 물을 품고 있다. 태아를 감싼 양수처럼 아늑하게. 놀랐던 까닭은 제천의 한자어 뜻을 헤아리지 않았던 탓일 수 있다. 풀이하면 물가에 쌓은 방죽. 1000년도 더 옛날에 만든 저수지 의림지(義林池)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제천 전체가 넉넉한 물을 담고 있는 큰 둑인 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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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청풍면 비봉산 정상 하늘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청풍호 남쪽. 물 건너 악어섬, 그 너머 황학산, 월악산이 겹쳐져 보인다.

 

● 푸른 하늘 맑은 바람

1985년 준공된 충주댐은 제천을 비롯해 충주, 단양 많은 마을을 물속에 담고 있다. 제천 청풍면은 27개 마을 가운데 25곳이 잠겼다. 그렇게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 충주호를 제천에서 청풍호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정원선, ‘제천, 스물두 개의 아스피린’, 해토, 2015).청풍호 가운데 청풍면이 있다. 그 가운데 솟은 산이 비봉산(해발 531m)이다. 비봉산 정상 하늘전망대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본다. 물이 청풍면을 350도쯤 에워싸고 있다. 섬이 아니지만 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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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호 북쪽. 물 너머 작성산 동산 금수산 소백산 등이 펼쳐진다.옛날 제천 사람들이 청풍강이라 부른 물은 비봉산 자락을 넓고 유장하게 휘돌아 흐른다. 물 건너 북쪽으로 금월봉, 작성산, 동산, 작은동산, 금수산, 신선봉, 소백산이 앞뒤로 옆으로 이어진다. 청풍면 대류리, 도곡리, 참실리가 반도처럼 삐져나온 남쪽은 경북 안동 물도리 마을을 크게 넓혀 놓은 것 같다. 그 물 건너 악어 모양 악어섬, 그 너머 황학산, 월악산이 중첩해 드러난다. 언덕 뒤에 산이 있고, 또 산이 그 뒤로 겹겹이 서 있는 경치는 언제 봐도 물리지 않는다. 멀리 어깨를 맞댄 산등성이와 능선이 꿈틀대듯 만들어 낸 지평선은 고요하면서 따사롭다. 옛사람이 청풍을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의 으뜸이 된다’고 한 까닭을 알 것 같다(권순긍, ‘제천의 문학과 문학지리’, 박이정,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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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비봉산 남동쪽 옥순봉로 앞까지 물을 끌어들였다. 담긴 물 모양이 한반도를 연상케 한다.산은 혹은 땅은 물을 톱니처럼, 피오르처럼 삐뚤빼뚤 몸 깊숙이 끌어들인다. 비봉산에서 남동쪽 옥순봉을 바라보며 직선거리로 6km쯤 가면 카페가 하나 나온다. 물은 카페 앞 옥순봉로(路) 턱밑까지 들어온다. 사람은 자연에서 익숙한 형상을 떠올리려고 한다. 완만한 언덕을 이룬 길가에서 내려다보면 물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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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 하늘전망대까지 연결되는 청풍호반 케이블카.드론으로 찍은 여행지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행기에 타지 않는 한 사진 속 광경을 직접 볼 확률은 매우 낮다. 사진으로는 놀랄 만큼 아름답지만, 현장에서는 그 장관을 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하늘전망대는 여행객에게 다소 친절하다. 케이블카 덕분이다. 타는 곳에서 정상까지 약 2.3km를 9개 큰 쇠기둥이 연결해 주는 궤도선에 매달려 올라간다.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는 없어도 90도 가까운 각도로 물과 산과 마을을 눈에 담는다. 산자락을 쓸어내리는 푸른 하늘 맑은 바람(청풍·淸風)이 케이블카를 스치고 물에 닿아 퍼진다.

● 여전한 삶의 공간

‘포말추산사화미(濃抹秋山似畫眉 곱게 단장한 가을 산, 여인 눈썹을 그린 듯하고)/원담평포벽유리(圓潭平布碧琉璃 둥근 못에는 푸른 유리 빛 잔잔히 깔려 있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가을 의림지를 읊은 시 일부다. ‘가을 산’의 산은 제천 진산(鎭山) 용두산을 가리킨다. 의림지는 샘이 솟는 용두산 자락 물길을 막아 만들었다. 청풍호 물이 가슴을 탁 틔우는 호방한 맛이 있다면, 의림지 물은 심지를 굳게 하는 의연한 멋이 있다.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이 물그릇에 띄운 티라이트(tealight) 양초처럼 드러난다. 나물로 무쳐 먹는 순채(蓴菜)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저수지 둘레로 적게는 100년, 많게는 500년 넘은 소나무들이 호위하듯 서 있다. 사이사이 수양버들도 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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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논에 물을 대고 있는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에서는 제천 사람들이 나물 무쳐 먹는 순채가 난다.용이 승천할 만도 한 물인데 과유불급을 경계하는 민초의 마음일까. 의림지 설화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자주 나온다. 어(魚) 씨 5형제가 때려잡은 의림지 괴물도 이무기이고, 하늘로 오르다 도중에 떨어져 용추폭포를 이룬 것도 이무기다.

의림지는 제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교과서를 통해 더 친숙하다. 하지만 삼국 시대 다른 두 저수지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가 물 마른 유적지에 그친다면, 의림지는 아래쪽 청전(靑田)뜰 논 약 200ha(약 60만 평)에 지금도 물을 댄다. 인간 삶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셈이다. 풍류를 즐기는 장소만이 아닌 생활 공간이기도 한 이유다.

그러니 미식(美食) 여행 ‘가스트로 투어’가 제천 도심과 이곳에서 펼쳐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쫀득한 찹쌀떡과 도넛, 빨간오뎅 등을 시내 두 코스에서 맛본다면, 의림지 두 코스에서는 약선(藥膳) 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그윽한 커피를 천천히 걸으며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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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藥膳) 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그윽한 커피를 마시며 미음완보할 수 있는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 코스의 솔밭.의림지 인근 ‘의림지 역사박물관’에 들르면 겨울에는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여름에는 배 띄워 뱃놀이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림지 제방과 바닥이 얼마나 치밀하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1972년 8월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범람 위기에 처하자, 주민 몇 명이 서쪽 둑방 일부를 무너뜨려 물을 빼낸 ‘덕분’이다. 다만 이 때문에 아랫동네에 수해가 나서 이들은 경찰 조사를 받는 고초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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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역사박물관에 조성된 겨울 의림지 풍경.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빙어를 낚았다.

● 물은 물고기를 바라고

제천은 해발고도가 300m를 넘나드는 데다 태백 소백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인 산악 분지 지형이다(‘제천의 문학과 문학지리’). 따라서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후미지고 으슥한 산골이 곳곳에 있다. 가톨릭 성지인 배론성지도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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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 예수 그리스도상 앞 연못.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 특히 신유박해(1801) 직후 천주교 신자들이 치악산을 넘거나 해서 이곳으로 피신해 주로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황사영(1775~1801)이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백서(帛書)를 쓴 곳도 이곳 옹기 보관 토굴에서였다.

단정한 잔디밭 너머로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이 보이고 연못과 십자가의 길이 나타난다. 성당 가는 길 왼편 잔디밭 끄트머리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석상이 놓여 있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데도 차분해진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골짜기 모양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다만 ‘론’의 한자(論 혹은 淪)에 그런 뜻이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찾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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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이 찾아온 사람들을 맞는다. 보기만 해도 차분해진다.배 밑바닥은 물에 닿는다. 배론의 천주교도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것은 물고기였을 터다.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익투스(ΙΧΘΥΣ)’라고 한다. 이 다섯 철자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들의 머리글자다. 고난의 밑바닥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신의 자비를 간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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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 신선봉 능선에 자리한 정방사. 거대한 암벽 의상대 아래 선 해수관음상이 저 멀리 청풍호를 내려다본다. 관음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을 늦추면서까지 중생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자비로 구제한다.자비를 찾기 위해 올라간다. 배론성지에서 남쪽으로 35km쯤 가면 금수산(錦繡山) 정방사(淨芳寺)가 나온다. 신선봉 능선의 의상대라는 거대한 암벽 아래 좁고 긴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 앞에 서면 멀리 월악산이 보이고 여러 산줄기 사이로 청풍호가 슬쩍 나타난다. 원통보전 관음보살과 큰 바위 앞에 선 해수관음 석상이 그 물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관음보살은 속세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 해수관음과 배론성지 성모상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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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사 원통보전과 다른 전각 사이로 산들이 중첩해 펼쳐진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 그 밑 물고기가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원통보전 처마 끝 풍경(風磬)에 매달린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린다.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쉼 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구원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띵~ 띵~ 풍경 소리를 뒤로한다. 욕망으로 요동치던 마음의 수면이 순간 잔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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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 자락 국립제천치유의 숲에서 시선을 산들로 향한다. 향기, 경관, 피톤치드 등이 오감을 자극하며 몸을 새롭게 한다. 이곳 산초나무잎을 따서 양쪽 눈밑에 붙이면 모기가 달려들지 못한다. 생강나무잎은 또 어떤가. 어떤 것은 하트 모양, 어떤 것은 뫼 산(山) 자 모양이다.

 

[동아일보 2025년 10월 25일]

D-300, 시민과 함께 만드는 박람회
돌산·금오도·개도·여수세계박람회장… 61일간의 축제 앞둬

2026 여수세계섬박람회는 오는 2026년 9월 5일부터 11월 4일까지 61일간 전남 여수 일원에서 세계 최초로 섬을 주제로 하는 정부 인정 국제행사다.

주 행사장인 여수 돌산 진모지구에서는 8개의 전시관이 건설 중이며, 금오도와 개도 부 행사장에서는 다양한 섬 체험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다. 이 기간 여수는 365개의 섬과 바다를 무대로 세계 방문객을 맞이한다.

행사의 주제인 ‘섬, 바다와 미래를 잇다’는 섬을 고립된 공간이 아닌 환경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미래 지향적 공간으로 재조명한다. 기후위기와 해양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섬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까지 필리핀, 일본, 프랑스 등 18개국과 국제기구가 참가를 확정했으며, 30개국 참가 목표를 향해 유치 활동이 한창이다.

 

돌산 진모지구 주 행사장 5만5000평 부지에는 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한 8개 전시관이 조성된다. 첨단 미디어아트와 그래픽 패널이 활용되며, ‘첨단 항공 모빌리티(AAM)’ 전시와 위그선(고속 수상선) 시연도 준비 중이다. 박람회 기간 61일간 매일 다양한 공연과 문화행사도 펼쳐진다.

부 행사장인 금오도와 개도는 박람회의 특별한 무대다. 금오도에서는 해안 절벽을 따라 18.5km의 트레킹 코스가 운영되며, 섬마을 주민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개도에는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캠핑장과 카약,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또한 요가, 트레킹 등 힐링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여수세계박람회장 부 행사장에서는 학술대회와 국제 포럼이 개최된다. 8월의 ‘섬의 날 행사’를 비롯해 9월에는 ‘세계 섬 도시대회’와 ‘국제 섬 포럼’이 열려 섬의 생태, 문화, 지속가능 발전 방안을 논의한다.

여수시는 박람회를 300일 앞두고 ‘시민 참여주간’을 지정해 2500여 명의 시민과 공무원이 함께 박람회 홍보와 지역 활성화에 나선다. SNS 챌린지, 로컬푸드 할인 행사, 청소년 대상 퀴즈 대회 등 58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조직위원회는 행사장 조성과 숙박, 안전 등 준비 상태를 점검하며, 관람객 증가에 대비해 임시주차장 면적 확대와 셔틀버스 운행 등을 추진하고 있다. 김종기 사무총장은 “D-300은 본격적인 홍보 시작점이며, 300일 뒤 여수에서 세계가 섬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역사적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람회 개막까지 남은 300일, 여수는 세계 최초의 ‘섬 박람회’ 성공을 향해 시계를 다시 맞추고 있다.

김상준 기자 ksj@donga.com

 

[동아일보 2025년 11월 8일]

내려다보니 물이었다.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그곳 제천(堤川)에서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다. 남한강이 허리를 감아 돌긴 하지만 지금 산들은 물을 품고 있다. 태아를 감싼 양수처럼 아늑하게. 놀랐던 까닭은 제천의 한자어 뜻을 헤아리지 않았던 탓일 수 있다. 풀이하면 물가에 쌓은 방죽. 1000년도 더 옛날에 만든 저수지 의림지(義林池)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제천 전체가 넉넉한 물을 담고 있는 큰 둑인 양하다.

제천 청풍면 비봉산 정상 하늘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청풍호 남쪽. 물 건너 악어섬, 그 너머 황학산, 월악산이 겹쳐져 보인다.

 

● 푸른 하늘 맑은 바람

1985년 준공된 충주댐은 제천을 비롯해 충주, 단양 많은 마을을 물속에 담고 있다. 제천 청풍면은 27개 마을 가운데 25곳이 잠겼다. 그렇게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 충주호를 제천에서 청풍호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정원선, ‘제천, 스물두 개의 아스피린’, 해토, 2015).

 

청풍호 가운데 청풍면이 있다. 그 가운데 솟은 산이 비봉산(해발 531m)이다. 비봉산 정상 하늘전망대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본다. 물이 청풍면을 350도쯤 에워싸고 있다. 섬이 아니지만 섬처럼 보인다.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호 북쪽. 물 너머 작성산 동산 금수산 소백산 등이 펼쳐진다.

 

옛날 제천 사람들이 청풍강이라 부른 물은 비봉산 자락을 넓고 유장하게 휘돌아 흐른다. 물 건너 북쪽으로 금월봉, 작성산, 동산, 작은동산, 금수산, 신선봉, 소백산이 앞뒤로 옆으로 이어진다. 청풍면 대류리, 도곡리, 참실리가 반도처럼 삐져나온 남쪽은 경북 안동 물도리 마을을 크게 넓혀 놓은 것 같다. 그 물 건너 악어 모양 악어섬, 그 너머 황학산, 월악산이 중첩해 드러난다. 언덕 뒤에 산이 있고, 또 산이 그 뒤로 겹겹이 서 있는 경치는 언제 봐도 물리지 않는다. 멀리 어깨를 맞댄 산등성이와 능선이 꿈틀대듯 만들어 낸 지평선은 고요하면서 따사롭다. 옛사람이 청풍을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의 으뜸이 된다’고 한 까닭을 알 것 같다(권순긍, ‘제천의 문학과 문학지리’, 박이정, 2020).

땅은 비봉산 남동쪽 옥순봉로 앞까지 물을 끌어들였다. 담긴 물 모양이 한반도를 연상케 한다.

 

산은 혹은 땅은 물을 톱니처럼, 피오르처럼 삐뚤빼뚤 몸 깊숙이 끌어들인다. 비봉산에서 남동쪽 옥순봉을 바라보며 직선거리로 6km쯤 가면 카페가 하나 나온다. 물은 카페 앞 옥순봉로(路) 턱밑까지 들어온다. 사람은 자연에서 익숙한 형상을 떠올리려고 한다. 완만한 언덕을 이룬 길가에서 내려다보면 물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비봉산 하늘전망대까지 연결되는 청풍호반 케이블카.

 

드론으로 찍은 여행지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행기에 타지 않는 한 사진 속 광경을 직접 볼 확률은 매우 낮다. 사진으로는 놀랄 만큼 아름답지만, 현장에서는 그 장관을 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하늘전망대는 여행객에게 다소 친절하다. 케이블카 덕분이다. 타는 곳에서 정상까지 약 2.3km를 9개 큰 쇠기둥이 연결해 주는 궤도선에 매달려 올라간다.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는 없어도 90도 가까운 각도로 물과 산과 마을을 눈에 담는다. 산자락을 쓸어내리는 푸른 하늘 맑은 바람(청풍·淸風)이 케이블카를 스치고 물에 닿아 퍼진다.

● 여전한 삶의 공간

‘포말추산사화미(濃抹秋山似畫眉 곱게 단장한 가을 산, 여인 눈썹을 그린 듯하고)/원담평포벽유리(圓潭平布碧琉璃 둥근 못에는 푸른 유리 빛 잔잔히 깔려 있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가을 의림지를 읊은 시 일부다. ‘가을 산’의 산은 제천 진산(鎭山) 용두산을 가리킨다. 의림지는 샘이 솟는 용두산 자락 물길을 막아 만들었다. 청풍호 물이 가슴을 탁 틔우는 호방한 맛이 있다면, 의림지 물은 심지를 굳게 하는 의연한 멋이 있다.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이 물그릇에 띄운 티라이트(tealight) 양초처럼 드러난다. 나물로 무쳐 먹는 순채(蓴菜)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저수지 둘레로 적게는 100년, 많게는 500년 넘은 소나무들이 호위하듯 서 있다. 사이사이 수양버들도 합을 이룬다.

지금도 논에 물을 대고 있는 의림지. 가운데 순주섬에서는 제천 사람들이 나물 무쳐 먹는 순채가 난다.

 

용이 승천할 만도 한 물인데 과유불급을 경계하는 민초의 마음일까. 의림지 설화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자주 나온다. 어(魚) 씨 5형제가 때려잡은 의림지 괴물도 이무기이고, 하늘로 오르다 도중에 떨어져 용추폭포를 이룬 것도 이무기다.

의림지는 제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교과서를 통해 더 친숙하다. 하지만 삼국 시대 다른 두 저수지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가 물 마른 유적지에 그친다면, 의림지는 아래쪽 청전(靑田)뜰 논 약 200ha(약 60만 평)에 지금도 물을 댄다. 인간 삶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셈이다. 풍류를 즐기는 장소만이 아닌 생활 공간이기도 한 이유다.

그러니 미식(美食) 여행 ‘가스트로 투어’가 제천 도심과 이곳에서 펼쳐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쫀득한 찹쌀떡과 도넛, 빨간오뎅 등을 시내 두 코스에서 맛본다면, 의림지 두 코스에서는 약선(藥膳) 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그윽한 커피를 천천히 걸으며 음미한다.

약선(藥膳) 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그윽한 커피를 마시며 미음완보할 수 있는 의림지 가스트로 투어 코스의 솔밭.의림지 인근 ‘의림지 역사박물관’에 들르면 겨울에는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여름에는 배 띄워 뱃놀이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림지 제방과 바닥이 얼마나 치밀하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1972년 8월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범람 위기에 처하자, 주민 몇 명이 서쪽 둑방 일부를 무너뜨려 물을 빼낸 ‘덕분’이다. 다만 이 때문에 아랫동네에 수해가 나서 이들은 경찰 조사를 받는 고초를 치러야 했다.

의림지 역사박물관에 조성된 겨울 의림지 풍경.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빙어를 낚았다.

● 물은 물고기를 바라고

제천은 해발고도가 300m를 넘나드는 데다 태백 소백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인 산악 분지 지형이다(‘제천의 문학과 문학지리’). 따라서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후미지고 으슥한 산골이 곳곳에 있다. 가톨릭 성지인 배론성지도 그런 곳이다.

배론성지 예수 그리스도상 앞 연못.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 특히 신유박해(1801) 직후 천주교 신자들이 치악산을 넘거나 해서 이곳으로 피신해 주로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황사영(1775~1801)이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백서(帛書)를 쓴 곳도 이곳 옹기 보관 토굴에서였다.

단정한 잔디밭 너머로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이 보이고 연못과 십자가의 길이 나타난다. 성당 가는 길 왼편 잔디밭 끄트머리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석상이 놓여 있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데도 차분해진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골짜기 모양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다만 ‘론’의 한자(論 혹은 淪)에 그런 뜻이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찾기는 어렵다.

배론성지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이 찾아온 사람들을 맞는다. 보기만 해도 차분해진다.

 

배 밑바닥은 물에 닿는다. 배론의 천주교도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것은 물고기였을 터다.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익투스(ΙΧΘΥΣ)’라고 한다. 이 다섯 철자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들의 머리글자다. 고난의 밑바닥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신의 자비를 간구한 것이다.

금수산 신선봉 능선에 자리한 정방사. 거대한 암벽 의상대 아래 선 해수관음상이 저 멀리 청풍호를 내려다본다. 관음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을 늦추면서까지 중생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자비로 구제한다.

 

자비를 찾기 위해 올라간다. 배론성지에서 남쪽으로 35km쯤 가면 금수산(錦繡山) 정방사(淨芳寺)가 나온다. 신선봉 능선의 의상대라는 거대한 암벽 아래 좁고 긴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 앞에 서면 멀리 월악산이 보이고 여러 산줄기 사이로 청풍호가 슬쩍 나타난다. 원통보전 관음보살과 큰 바위 앞에 선 해수관음 석상이 그 물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관음보살은 속세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 해수관음과 배론성지 성모상이 겹쳐 보인다.

정방사 원통보전과 다른 전각 사이로 산들이 중첩해 펼쳐진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 그 밑 물고기가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원통보전 처마 끝 풍경(風磬)에 매달린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린다. 눈꺼풀이 없어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쉼 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구원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띵~ 띵~ 풍경 소리를 뒤로한다. 욕망으로 요동치던 마음의 수면이 순간 잔잔해진다.

금수산 자락 국립제천치유의 숲에서 시선을 산들로 향한다. 향기, 경관, 피톤치드 등이 오감을 자극하며 몸을 새롭게 한다. 이곳 산초나무잎을 따서 양쪽 눈밑에 붙이면 모기가 달려들지 못한다. 생강나무잎은 또 어떤가. 어떤 것은 하트 모양, 어떤 것은 뫼 산(山) 자 모양이다.

글·사진 제천=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동아일보 2025년 10월 25일]

‘2025 세계유산축전―선암사·순천갯벌’의 부대 행사 중 하나인 ‘갈대 백패킹’이 열린 장소. 박준형 제공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보슬비가 내리던 지난달 어느 토요일 아침, 배낭을 메고 세종시 집을 나선 나와 아들은 고속열차(KTX)에 몸을 실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2025 세계유산축전―선암사∙순천갯벌’이 한창인 전남 순천이었다. 세계유산축전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그 의미를 시민들과 나누는 문화축제다. 선암사와 순천 갯벌 일대에서 펼쳐진 세계유산축전은 다양한 부대 행사가 더해졌다. 그중 하나가 ‘갈대 백패킹’이다. 우리를 순천으로 이끈 프로그램이다. 순천만 안풍습지에서 진행되는 1박2일 캠핑 행사다. 이 지역은 평소에는 야영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순천만의 생태와 밤하늘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단 1회에 그쳤던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엔 축전 기간 중 총 3회에 걸쳐 진행됐다.

프로그램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되기에 오전에 도착한 우리에겐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오전 10시30분에 순천역을 출발하는 시티투어버스에 올랐다. 남도 특유의 구수한 억양으로 순천의 요모조모를 들려주는 베테랑 관광 가이드의 해설은 흥을 돋웠다. 송광사와 순천만습지, 순천만국가정원을 돌아보는 시티투어버스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했다. 그중 한 외국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밝힌 여성은 최근 유럽을 휩쓴 케이(K)팝과 케이드라마 열풍에 매료돼 한국을 찾았다고 했다. 서울과 제주, 경주, 전주를 거쳐 순천까지, 한달째 홀로 전국을 여행 중인 그는 “한국은 어느 도시를 가든 도로가 깨끗하고, 편리한 대중교통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한국 여행을 적극 추천할 것”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2025 세계유산축전―선암사·순천갯벌’의 부대 행사 중 하나인 ‘갈대 백패킹’이 열린 장소. 박준형 제공
논과 밭을 보며 걷다가 발견한 ‘갈대 백패킹’ 운영본부 텐트. 박준형 제공

 

시티투어버스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우리는 순천만습지 매표소 앞 세계유산축전 부스에서 ‘갈대 백패킹’ 참가자로서 체크인을 했다. 매표소부터 ‘갈대 백패킹’ 행사가 진행되는 안풍습지까지는 3㎞. 아이 걸음으로 한시간 거리다. 오전 내내 내린 보슬비가 그쳤다. 우리는 해밀(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만끽하며 순천만을 눈에 담았다. 갯벌과 논, 갈대가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까지 맑아졌다.

 

“아빠! 여기 한 손은 작고 한 손만 큰 게 보이지? 저게 농게야! 그리고 저건, 칠게인가 보다!” 최근 갯벌 생태에 대해 배웠다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 서진이가 재잘거리며 흑두루미와 칠면초, 짱뚱어 등 학교에서 배운 것을 읊조렸다. “참, 멸종위기종인 검은머리갈매기는 전세계의 11%가 순천만에 서식한대. 아! 저기 망원경 있다! 검은머리갈매기 있나 찾아보자!” 서진이는 망원경을 향해 뛰어갔고, 길가의 작은 게들은 재빠르게 길을 터주었다.

안풍습지 가는 길. 박준형 제공

 

좌우로 펼쳐진 논과 갈대밭을 음미하며 걷다 보니 오른편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 한편에 하얀 몽골 텐트가 보였다. “왐마, 날씨가 참 덥죠~. 시원한 물 한잔 들이켜고 마음에 드는 자리 잡으세요.” ‘갈대 백패킹’ 스태프가 시원한 생수병을 건네며 우리를 반겨줬다. “오늘 박지는 여기가 좋겠어, 아빠!” 시원하게 펼쳐진 안풍습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리던 아들이 외쳤다. 우리가 텐트를 설치하는 사이, 하나둘 이웃이 늘어갔다.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있었다. 두 딸과 함께 배낭을 메고 여수에서 온 가족,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와 순천에서 온 가족, 그리고 서진이 또래의 아이와 창원에서 온 또 다른 아빠 백패커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어른과 아이 백패커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갈대 백패킹’ 행사가 펼쳐진 장소에 들어선 텐트들. 박준형 제공
 

“순천만습지를 둘러싼 논과 밭의 곡물은 추수철이 돼도 수확하지 않아요. 순천만을 찾는 겨울 철새들과 흑두루미의 식량인 셈이죠. 그래서 이 주변의 논밭에는 농약을 치지 않는답니다.” 세계유산축전과 ‘갈대 백패킹’의 운영을 맡고 있는 양지현(45)씨가 아직은 초록이 깃든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 세계유산축전이 끝나면 황금빛으로 물든 갈대밭을 감상하러 수많은 사람이 순천만을 찾을 거예요. 그리고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겨울 철새들이 순천만을 수놓습니다. 특히 흑두루미의 군무는 정말 장관이에요. 겨울의 차분한 순천만에서 즐기는 탐조 프로그램도 아이들과 즐기기 참 좋습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아이들은 마치 오랜 친구인 듯 연신 웃음을 쏟아내며 잔디밭을 뛰놀았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순천만의 밤은 고요하게 저물어 갔다.

 

박준형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 저자

 

[한겨레 ESC 2025년 11월 15일]

제주 가을 여행-천왕사 단풍

2025. 12. 9. 07:02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안동 하회마을

2025. 11. 26.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제주 여행-와흘 메밀밭

2025. 11. 25. 07:03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진우석의 Wild Korea 〈29〉 제주 캠핑 여행


가파도 야트막한 언덕 밭에 조성한 태봉왓캠핑장. 백패커 사이에서 이름난 캠핑 명당이다. 바다 건너 펼쳐진 한라산의 모습이 일품이다. 주변에 시야를 막는 높은 산이 없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여행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에 차를 싣고 제주도 캠핑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에 닿기 전, 목포의 눈부신 야경과 남해안의 뭇 섬을 바라보는 맛이 각별했다. 제주 교래자연휴양림 야영장은 늪서리오름의 분화구에 자리해 포근했다. 백패킹으로 다녀온 가파도도 좋았다. 바다 건너 가파도에서 바라본 제주는 처음 보는 듯 새로운 얼굴이었다.

목포와 남도 섬 여행


목포 평화광장의 ‘목포 춤추는 바다 분수’.

목포항에서 제주행 퀸제누비아호의 출항 시간은 오전 8시 30분. 목포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목포 평화광장을 산책했다. 저물면서 빛나는 목포 야경이 제법 근사했다. 마침 ‘목포 춤추는 바다 분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제주 가는 길목에서 목포의 낭만을 즐겼다.

 


제주도행 퀸제누비아호. 목포에서 제주까지는 4시간 30분이 걸린다.

퀸제누비아호는 거대한 빌딩을 연상케 했다. 차를 싣고 객실로 올라왔다. 배는 유달산의 배웅을 받으며 목포대교 아래를 지나 투명한 바다로 미끄러졌다. 목포를 벗어나자 서남해안 섬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며 자태를 뽐냈다.

특히 진도에서 가까운 양덕도의 발가락바위와 주지도의 손가락바위는 신이 빚은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일대는 진도관광유람선이 도는 코스다. 이름도 낯선 독거도와 탄항도, 익숙한 추자도 일대의 풍광이 빼어났다.

추자도를 벗어나자 망망대해가 펼쳐졌고, 그제야 한숨 돌리며 섬 구경을 마쳤다. 선실에서 좀 쉬려고 하니 그리 오래지 않아 제주에 닿았다. 목포에서 제주까지 4시간 30분. 거짓말처럼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늪서리 오름에 안긴 야영장


교래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장대한 곶자왈 지대를 걸을 수 있다.

제주에 입도했다. 먼저 마트에서 한치와 광어회 등을 푸짐하게 샀다. 그리고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교래자연휴양림 야영장에 텐트를 쳤다.

감개무량했다. 제주 오름을 다닐 때마다 한 번은 꼭 그 안에서 잠들고 싶었다. 이 소망을 들어준 곳이 교래자연휴양림이다. 거대한 늪서리 오름 분화구 안을 야영장으로 잘 꾸며 두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에 속이 다 시원하다. 유치원에서 온 아이들이 너른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모습에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교래자연휴양림 야영장을 비추는 달빛에 홀려 잠을 설쳤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밤을 기다린다. 오름 위로 쑥 반달이 떴다. 밤이 되자 이슬이 내려앉는다. 텐트가 펑 젖었다. 오름 분화구의 독특한 날씨 때문이다. 타프를 쳐놓길 잘했다.

짐을 타프 아래로 옮기고 돗자리 깔고 누워 할 일 없이 달을 쳐다본다. 구름이 달을 스쳐 간다. 한없이 평화로운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구름 같고 달 같은 평온이 세상을 물들인다. 여기서 이틀을 구름에 달 가듯 게으르게 보내고, 백패킹 장비만 간추려 가파도로 떠났다.

가파도에서 본 제주도

 

제주도 서남쪽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10분 만에 가파도에 닿았다. 캠핑장은 가파도 남쪽 가파항 근처에 있다. 걸어서 30분쯤 걸린다. 가파도 터미널에서 왼쪽 해안길을 따른다. 제주올레 10-1코스와 겹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바닷바람 맞으며 걷는 맛이 상쾌하다.

태봉왓캠핑장에 도착하자 주인 이태봉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왓’은 제주 말로 밭이란 뜻이다. 이태봉씨 밭에 만든 캠핑장이란 뜻이다. 캠핑장에 관해 물으니 그가 말했다.

“여기는 해 뜨고 지는 게 제일 멋져요. 캠핑장에서 다 볼 수 있어요”

캠핑장은 데크 구역과 파쇄석 구역으로 나뉜다. 10개의 테크 중 하나에 텐트를 치고, 파쇄석 구역으로 가봤다. 아뿔싸! 여기가 명당이다. 바다 건너 한라산을 정점으로 제주 전체가 일필휘지로 펼쳐졌다.

시야를 한라산 오른쪽 끝으로 돌리면 성산에 닿는다. 세 개의 작은 봉우리가 눈에 띈다. 지미봉, 성산일출봉, 우도봉이다. 세 오름이 올망졸망 나란히 보이는 게 신기하다.


태봉왓캠핑장에서 된장국·밥 등으로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백패킹 때는 단출하게 먹는 게 좋다.

이날은 10개 데크 중 7개가 찼다. 손님은 대개 싱글이거나 연인이다. 해 저물 무렵이 되자 다들 저녁 준비로 바쁘다. 된장국·밥·김으로 소박한 저녁상을 차렸다. 눈을 들면 바다와 마라도가 보인다. 밥 한술 뜨고 마라도를 바라봤다. 밥 먹는 사이 서편 하늘이 곱게 물들었다.

백패킹은 빛이 허락한 만큼만 활동할 수 있다. 어두우면 자야 한다. 이 얼마나 단순한 삶인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반딧불이가 찾아왔다. 덕분에 텐트가 반짝반짝 빛났다.

다음 날 오전 5시 30분. 시계가 울렸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파쇄석 자리로 갔다. 벌써 성산일출봉 동쪽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이처럼 크고 넓은 여명을 본 적이 없다. 여명이 구름과 바다를 집어삼키자 어느 순간 봉긋 해가 떠올랐다.

커피 한잔 마시며 벅차오른 감정을 다독인다.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목포~남해안~제주를 아우르는 충만한 캠핑 여행이었다. 색다른 제주를 원하는 이에게 권한다.


신재민 기자

☞여행정보=목포국제여객터미널에서 제주 가는 퀸제누비아호가 1일 2회 운행한다. 어른 3만2150원. 승용차 선적 요금은 16만~18만원. 제주도 캠핑장은 사용료(1만원 내외)가 저렴한 교래자연휴양림·붉은오름자연휴양림·모구리야영장·관음사야영장 등을 추천한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이 있어 보조 배터리가 필수다. 가파도 태봉왓캠핑장은 초보 백패커에게 적당하다. 주변 식당을 이용하면 먹거리를 안 가져가도 된다.


글·사진=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4482


서해 고군산군도 다섯 개의 섬을 잇는 해상인도교가 내년 전면 개통을 앞두고 있다. 말도에서 방축도까지 14㎞ 길이의 트레일이 완성되는 셈이다. 2021년 먼저 개통한 방축도 출렁다리(83m).

전북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 먼바다에 섬 다섯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일명 ‘끝섬’이라 불리는 말도에서 방축도(말도~보농도~명도~광대도~방축도)까지 이어지는 다섯 섬은 문자 그대로 ‘절해고도(絕海孤島)’다. 보농도와 광대도는 무인도, 나머지 세 섬도 인구를 다 합쳐봐야 200명 남짓이다.

서해의 이 외딴 섬이 ‘K관광섬’으로 뜰 채비를 마쳤다. 5개 섬을 하나로 잇는 해상인도교가 내년 상반기 정식 개통을 앞두고 있다. 섬과 섬을 한 줄로 꿰는 해상 트레일이 열리는 셈이다. 일명 ‘군산 섬잇길’ 일부 구간을 먼저 걸어봤다.

말도~보농도~명도~광대도~방축도 연결



말도와 보농도를 연결하는 1교(308m)도 17일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고군산군도 육로의 끝 장자도에서 뱃길로 50분을 달려 말도에 닿았다. 말도등대부터 들렀다. 1909년 세운 말도등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항 자원 수탈의 현장을 굽어보던 장소다. 지금은 말도 최고의 포토존으로 통한다.

말도에서 방축도까지 잇는 일명 ‘5도 4교’의 해상인도교 사업은 2017년 첫 삽을 떴다. 14㎞ 길이의 트레일이 연결되는 전면 개통은 내년 상반기로 예정됐다. 현재 3교(명도~광대도·555m)만 빼고 나머지 다리는 공사가 끝났다.

2021년 개통한 방축도 출렁다리(4교)는 고군산군도의 새 랜드마크로 뜬 지 오래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덕분에 없던 식당이 생기고, 어촌 체험마을도 들어섰다. 말도와 보농도를 잇는 1교(308m)도 이달 17일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차준홍 기자

5도 4교의 잠재성을 인정받아 이들 5개 섬은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K관광섬’ 사업에 선정됐다. 군산시 김봉곤 문화관광국장은 “캠핑장, 해안 데크로드, 쉼터도 속속 들어선다”라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도 내년 말도등대~1교 트레킹 등 해상트레킹 상품을 개발해 홍보할 계획이다.

말도 동쪽 끝 언덕에 섰다. 1교~보농도~2교~명도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 줄기의 능선처럼 보였다. 마치 바다 위 작은 만리장성 같았다.

명도엔 알리나, 방축도엔 덕순이


러시아에서 온 알리나. 직접 요트를 몰아 섬 투어 프로그램도 이끌고, 명도에서 펜션도 운영한다.

명도는 작은 섬이다. 펜션은 몇 곳 있지만, 식당도 없고 구멍가게도 없다.

명도의 얼굴은 뜻밖에도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 알리나(41)다. 서울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하던 모범생(박경리·백석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고 한다)이 2020년 불쑥 섬으로 들어와 펜션 ‘블루 아이즈’를 열었다.

그는 능숙한 한국어로 “섬에서 고립이 아니라 여유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직접 요트를 모는 섬 투어가 입소문을 타 연말까지 객실 예약이 꽉 찼다.


방축도 마스코트 ‘덕순이’.

방축도에선 길 안내 하는 강아지 ‘덕순이’가 명물로 통한다. 배에서 내리자 인기척을 들었는지 덕순이가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왔고 섬 끝까지 앞장서 길잡이 노릇을 했다.

방축도는 가파른 말도·명도에 달리 평지가 많아 발이 가벼웠다. 덕순이와 섬 맨 끝의 방축도 출렁다리에 올랐다. 속이 뻥 뚫린 독립문 바위, 물결 모양으로 주름진 습곡, 고군산군도의 거칠 것 없는 풍경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말도식당’은 그날 잡힌 갯것으로 밥상을 낸다. 갑오징어볶음·꽃게장·간재미탕이 주로 올라온다.

☞여행정보=장자도 선착장에서 평일 2회, 주말 3회 말도·방축도행 배가 뜬다. 방축도는 25분(7200원), 말도는 45분(8200원)이 걸린다. 명도는 보행교 공사로 여객선이 들지 못한다. 대신 방축도에서 명도를 오가는 배가 셔틀처럼 오간다. 편의시설은 부족하지만, 아침 식사를 주는 민박이 섬마다 있다. 말도 안쪽의 ‘말도식당’은 그날 잡힌 갯것으로 밥상을 차린다. 요즘은 갑오징어볶음·꽃게장·간재미탕이 주로 올라온다. 방축도에선 꽃게 넣은 해물라면이 인기다.

군산=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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