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리마을카페’를 지나면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돌 바위 등이 나타난다. 박미향 기자
제주 바람은 특별하다. 지난 23일 제주 서귀포시 온평포구 낡은 선착장엔 여름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가을바람이 불었다. 여행객들의 얼굴을 한 바퀴 쓰다듬고 돌아 다시 바다로 나가는 제주 가을바람엔 ‘잠시 멈추고 쉬고 가라’는 속삭임이 담겨 있었다. 온평포구는 ‘놀멍 쉬멍 꼬닥꼬닥’(놀며 쉬며 천천히)이란 수식어가 붙는 제주올레 3코스의 출발점이다. 오는 11월3~4일 이틀간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제주특별자치도 후원을 받아 3코스와 4코스를 묶어 ‘제주 올레걷기 축제’를 펼친다. 총 코스는 3가지. ‘3코스 A’, ‘3코스 B’와 ‘4코스 역방향’이다. 미리 가본 3코스 A는 쉼표와 동의어였다.
제주는 개도 특별하다. 온평포구에서 신산포구까지 자박자박 걷는 동안 여행객을 반갑게 맞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개들의 목엔 줄이 없었다. 최근 뉴스에 등장했던 ‘개 테러’가 떠올라 두려움에 바짝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한 주민에게 “왜 묶어 두지 않느냐”라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희한했다. “제주 개는 본래 묶인 적이 없다. 우리 새끼(자녀)랑 같은데, 여행객 때문에 답답한 목줄을 걸어야 되겠냐! 순하니 겁낼 필요 없다.” 얘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눈앞의 개가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졸졸 따라오면서 ‘이쪽으로 걷는 게 더 안전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개 테러’는 선입견이 가져다준 기우였다.
온평포구에서 용머리동산, 연듸모수 숲길을 지나 신산포구로 이어지는 ‘3코스 B’의 전반부는 제주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오롯이 관찰할 수 있는 여행길이었다. 2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도로의 한쪽은 알록달록한 지붕이 낮게 땅에 붙어 있고 더러 공장 같은 낡은 건물도 보였다. 구멍 뚫린 셔츠가 빨랫줄에 나부끼고 뚝딱뚝딱 지붕 수리하는 어부들의 굽은 허리가 눈에 박혔다. 일상이 녹아든 풍경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맛이다. 다른 쪽은 거친 돌 바위와 엉클어진 잡풀들이 무성한데 그 바깥은 바다다. 2차선 도로 옆의 걷는 길은 자전거 통행 겸용이다. 라이더들과 같이 이용한다는 게 마뜩지 않다가도 그들이 손을 들어 인사하면 마음이 사르륵 녹는다. ‘맞아, 그도 나도 그저 푸른 제주를 공유하는 친구일 뿐’이라는 생각에 가벼운 목례로 응답을 했다. 마을 풍경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모두가 친구가 된다.
’3코스 B’를 걷다 보면 흔히 발견하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박미향 기자
온평포구 인근에 있는 해녀 동상들. 박미향 기자
가을은 시의 계절이다. 또박또박 시를 읽기에 제주올레의 호젓한 길만한 곳도 없다. 연듸모수 숲길에 앉아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펼쳤다. 추석을 앞둔 터라 시 ‘인천 반달’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그때부터 눈에/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시의 초입과 말미를 읽다 보니 숲길에서 부는 바람이 추석 인사를 하는 듯했다. 책상머리에서 읽는 시와는 다른 맛이었다. 오전 11시쯤 출발해 1시간 넘게 걷자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멀리서 ‘신산리마을카페’가 보였다. 여행객들에겐 오아시스다. 녹차와 녹차아이스크림, 녹차초콜릿 등을 판다. 2006년부터 신산리 주민들은 1만9834㎡(6000평) 밭에 녹차를 심기 시작했다. 지금은 6611㎡(2000평) 정도만 남았다. 수확한 찻잎은 마을 사업의 하나로 연 카페의 여러 가지 메뉴가 됐다. 이명희(45) 관리총괄은 “해풍을 맞으며 자란 녹차라서 맛이 남다르다”며 자랑한다. 창이 넓은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바로 앞바다에서 뛰어노는 고래를 구경할 수도 있다고 한다. “고래를 본 이들은 한 해 운수가 밝다”고 그가 말했다. 그가 건넨 녹차아이스크림은 바다의 짠맛과 땅의 거친 맛이 날줄 씨줄처럼 엮어져 여행객의 혀를 사로잡았다. ‘제주올레 걷기축제’ 기간 동안 신산리 부녀회는 축제 참가자들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준비한다. 제주 전역은 여행객들의 끼니를 해결하려는 식당들로 넘쳐난다. 올해 10돌을 맞은 제주올레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총길이 425㎞의 26개 코스를 10년간 770만명이 다녀갔다. 축제 기간 신산리 부녀회가 만들 음식은 제주 어느 식당에서도 맛보기 힘든 제주 전통식이다. 돼지 뼈를 푹 끓이고 청정 제주 고사리와 메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끓이는 국과 오징어를 채 썰어 부친 오징어전을 내놓을 예정이다. 4코스의 토산2리 주민들도 한라산 표고버섯 비빔밥 등을 선보일 예정인데 축제의 백미는 바로 이들이 만든 제주 전통식이다.
’신산리마을카페’의 녹차 아이스크림. 박미향 기자
해녀포차 ’지환이네 해산물’의 평상 위에 있는 돌문어 숙회. 박미향 기자
바삭한 녹차초콜릿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떠나자 어디선가 까치 소리가 들렸다. 낚시꾼 주위를 맴도는 까치였다. 납작한 지붕 사이만 떠돌다 잠시 바닷가로 마실 나온 것일까? 이 코스엔 ‘원조 해녀의 집’ 등 해녀포차가 5~6개 있다. ‘지환이네 해산물’엔 바닷가에 붙어 있는 평상이 있어 돌문어 숙회 등을 바닷바람을 친구 삼아 주거니 받거니 먹을 수 있다.
‘3코스 B’의 후반부는 신풍신천바다목장, 소낭밭숲길, 표선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전반부처럼 잘 닦인 도로는 없지만 자연을 벗 삼아 걷기 좋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신풍신천바다목장의 들머리엔 ‘조용히 올레길을 걷는 올레객을 위해 바닷가와 인접한 잔디밭만 허용했다’는 글귀가 적힌 노란 철판이 있다. 자세히 읽고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목장 통행을 금한다는 당부의 말도 적혀 있다.
3코스 곳곳에 있는 제주올레 상징물. 박미향 기자
신풍신천바다목장. 두 명의 올레꾼이 걷고 있다. 박미향 기자
목장 안으로 들어가자 노랗고 푸른 능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자연의 따스한 원형을 맞닥뜨린 듯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걷다 보면 소똥을 발견하게 되는데 신발에 묻어도 그저 배시시 웃음만 나온다. 새삼 발견한 자신의 너그러움에 뿌듯해진다. 역시 순례는 ‘나를 만나는 길’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다시 시집을 펼쳤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지붕에 오르기’를 큰 소리로 읽었다. ‘나이 들면 신경이 멀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낙엽 한 장이 날아와 흔들리는 손에/ 잡힌다 메말라 붙은 신경이/ 공포, 생살의 비침, 이 가을 한 저녁.’ 걷는 동안 삐걱거리는 늙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날아드는 낙엽은 잡아채 시집 책갈피로 쓰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드디어 코스의 최종 목적지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6시간이 걸렸다. 하루를 마감하는 해풍이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음달 열리는 ‘제주올레 걷기축제’ 신청서를 쓰고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코스 B/온평포구→용머리동산→연듸모수 숲길→신산환해장성→신산포구→신산리마을카페→주어동포구→신풍포구→신풍신천바다목장→소낭밭숲길 입구→배고픈다리→하천리쉼터→표선해수욕장
▶▶3코스 A/온평포구→난산리→통오름입구→독자봉→김영갑갤러리→천변길→신풍포구→신풍신천바다목장→소낭밭숲길 입구→배고픈다리→하천리쉼터→표선해수욕장
▶▶4코스 역방향/남원포구→벌포연대→태흥리포구→덕돌포구→송천→토산2리 마을회관→토산산책로→해병대길→가는개→표선해녀의집→해양수산연구원→갯늪→표선해녀탈의장→당케포구→표선해수욕장
제주/박미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