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투고 및 칼럼

이자 없는 세상 꿈꾼다

행복 기술자 2016. 9. 6. 07:00

침체되고 있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인하 경쟁을 벌이다가 이제는 마이너스 금리까지 시행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이 1월29일 시중은행의 중앙은행 예치금 가운데 일부에 대해 -0.1퍼센트의 금리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고, 스웨덴 중앙은행도 8월11일 기준금리를 -0.35퍼센트에서 -0.50퍼센트로 내렸다. 작년 말에 기준 금리를 0.25퍼센트 올린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최근 당장 실행할 가능성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마이너스 금리 적용 가능성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금리인하 경쟁에 다시 뛰어들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처럼 각국이 앞다퉈 금리를 낮추는 이유는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높여 경기 진작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자를 조정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돈에 이자가 붙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 이자의 부작용(?)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사실 최근 일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나 경제 성장과 경제 공황도 모두 이자의 특성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이자의 탄생으로 인해 현대 경제가 태동했고, 현대 경제의 대부분의 특성을 이자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토마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2015년 글항아리)에서 최근 심해지고 있는 부의 대물림에 의한 양극화가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물려받은 부를 가만히 두어도 이자에 의해 계속 부가 증가하기 때문에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저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2015년 김영사)에서 빈부 격차의 해소 방법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제안하고 있다. 만약 은행에 예금한 돈에 이자가 붙는 게 아니라 보관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부를 지킬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노력이 들어가야만 물려받은 부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이자가 만들어 내는 현대 경제의 또 다른 특성은 성장 일변도의 팽창 경제 체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자는 대출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대출을 받은 사람은 이자 이상의 수익을 내야만 현상 유지 내지 추가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문제는 전체 부의 규모는 고정되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자 이상의 수익을 내려고 하다 보니까 누군가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의자 뺏기’ 현상이 일어나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권 기능을 가진 정부에서는 부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통화량을 계속 늘리고 있다. 하지만 늘어난 통화량만큼 재화가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선 경제가 무조건 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 이자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수렵 채집 사회나 농경 사회에서는 사냥물이나 농산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거나 없어지기 때문에 부를 무작정 쌓아둘 수가 없어 이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화폐가 생긴 후에는 시간이 지나도 재화가 썩지 않게 되어 이자 개념이 생겨났다. 이자 부작용에 대해 유대인도 이미 알아차려 성경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했고, 희년을 두어 빚도 탕감해 주도록 강제하고 있다. 헌데 이자에 기반을 둔 현대 금융업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이자를 금지한’ 하나님도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유대인은 단순히 이자만 붙이는 게 아니라 경제에 거품을 잔뜩 넣어 헛된 부를 창출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상심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부는 이자에 기반을 둔 거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자 덕분에 부유해진 반면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 등 다양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초저금리를 단순히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이자 없는 행복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에너지경제신문 2016년 9월 5일 게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