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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이재언의 섬 ⑬ 대모도

2018. 1. 27.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청년 항일운동 얼 새겨진 완도 앞바다 ‘띠섬’ 대모도

이재언의 섬 ⑬ 대모도

 

대모도를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 섬 오른쪽 집들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 모서리다. 대모도는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 조건이 뛰어난 편이다. 이재언 제공
대모도를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 섬 오른쪽 집들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 모서리다. 대모도는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 조건이 뛰어난 편이다. 이재언 제공

전남 완도에서 직선거리로 9.1㎞ 떨어진 대모도의 형세는 유독 아기자기하다. 비교적 기복이 큰 섬의 중앙부엔 모성산과 대성산이 자리잡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사면은 경사가 완만해 농경지와 마을이 들어섰다. 대모도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건 약 400년 전. 1620년대 마씨와 방씨가 처음으로 들어가 마을을 형성했다는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진다. 예부터 이 섬엔 띠(모초·茅草)가 유독 많았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로 띠섬(모도)으로 불리다가 대모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대모도에 들어가면 모서리 선착장 앞에 서 있는 마을회관과 정자가 반가이 맞이한다. ‘띠섬 모도 서리’라는 표지석 옆에 모도항일운동기념비 안내문이 눈에 띈다. 안내문 뒤로는 약간 높은 둔덕이 있는데, 무성한 잡초 사이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억새로 뒤범벅된 공간에 비석 두 개가 나타난다. 왼쪽이 항일비 비석이고, 오른쪽이 북을 표현한 상징물이다. ‘독립의 혼이 북소리를 통해 남해 바다를 흔들어 울려 퍼지리라.’ 이 작은 섬이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다.

모동리 마을 풍경. 억척스러운 부인회 활동 덕에 행정기관을 모동리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재언 제공
모동리 마을 풍경. 억척스러운 부인회 활동 덕에 행정기관을 모동리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재언 제공

모도청년회 14명의 독립운동

비석이 서 있는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의 불씨가 일어난 역사적 무대다. 당시 대모도에는 마을의 개량서당을 지원하고 항일투쟁을 벌일 목적으로 1920년 초에 결성된 모도청년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천병섭·장석칠·정두실·최찬규·서재만 등 마을 청년 14명이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항일 무력시위를 권유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활동은 일본 경찰에 그만 발각됐고, 회원들은 모두 붙잡혀 심한 고초를 치렀다. 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섬은 대모도를 비롯해 소안도와 신지도 등이다. 소안도와 신지도는 비교적 크고 외부와의 교류도 활발한 여건을 갖췄으나, 대모도처럼 교통도 불편한 작은 섬에서 이런 당당한 활동이 존재했다는 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섬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금까지도 일깨워주는 자랑스러운 과거다.

모서리 마을의 돌담. 모서리엔 샤워장이 필요 없을 정도의 깨끗한 물이 바위에서 쉴 새 없이 흐른다. 이재언 제공
모서리 마을의 돌담. 모서리엔 샤워장이 필요 없을 정도의 깨끗한 물이 바위에서 쉴 새 없이 흐른다. 이재언 제공

1620년대 마씨·방씨가 처음 마을 이뤄
일제강점기 항일활동의 역사 자랑
모동리·모서리 주민 갈등의 과거도
인구 작은 모동리가 행정중심지 역할

대모도의 마을은 크게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다. 우선 모서리부터 살펴보자. 모서리의 돌담이나 형형색색 양철지붕은 흡사 청산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빼닮았다. 배 위에서 바라본 모서리는 해안가에서부터 높은 지점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모서리 해안엔 샤워장이 굳이 필요 없을 만큼 깨끗한 민물이 바위에서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다. 흐르는 물을 그냥 받아서 마시면 될 정도다. 모서리는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 조건이 양호해 주민들의 주 소득원 노릇을 한다. 모서리의 김 양식 어장은 완도군 내에서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웃한 노화도와 소안도 주민들에게 양식장을 임대해 짭짤한 수입을 올릴 정도다. 마을 끝자락엔 달랑 건물 두 채뿐인 청산중앙초등학교 모도분교가 자리잡고 있다. 한때 학생 175명이 다녔던 학교지만 지금은 선생님 한 명과 3명(남 2, 여 1)의 학생만 남아 있어 폐교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모서리 선착장 풍경. 모서리는 모동리에 비해 인구도 많고 수산업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이재언 제공
모서리 선착장 풍경. 모서리는 모동리에 비해 인구도 많고 수산업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이재언 제공

반대쪽엔 모동리가 있다. 모서리에 비해 규모가 작은 모동리에도 제법 높은 곳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만큼 고지대 마을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동리 쪽 선착장 방파제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섬의 두 마을을 잇는 도로가 놓이기 전엔 말할 수 없이 교통이 불편했다. 면 출장소, 보건진료소, 우편취급소 등은 모동리에, 학교와 경찰 출장소는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는 터라 두 마을 사이를 자주 오가야 했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모서리 선착장 옆에 서 있는 ‘띠섬 모도 서리’ 표지석. 이재언 제공
모서리 선착장 옆에 서 있는 ‘띠섬 모도 서리’ 표지석. 이재언 제공

이러다 보니 두 마을 사이엔 한때 갈등이 빚어진 적도 있다. 1964년, 두 마을의 경쟁을 거쳐 면사무소 출장소가 모동리에 세워지게 됐다. 이후 다른 공공기관들도 잇따라 모동리에 터전을 마련했다. 규모가 더 작은 모동리가 모서리를 제치고 행정 중심지 노릇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두 마을이 감정싸움을 벌인 것. 배경은 이렇다. 모동리에선 1960년대에 부인회가 나서 마을 재건운동을 의욕적으로 벌였다. 모동리 부인회는 밭농사, 멸치잡이, 해초 채취 등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리는 와중에도 매 끼니마다 보리쌀 한 숟가락씩을 따로 떼어내 저축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고양이 12마리를 사다 기르기 시작했고, 마을 공동 벽시계를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아이들을 위해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에 섬마을에 작은 도서관이 들어섰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모동리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더 많이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산중앙초등학교 모도분교. 지금은 달랑 세 명의 학생만 남아 폐교 위험에 처해 있다. 이재언 제공
청산중앙초등학교 모도분교. 지금은 달랑 세 명의 학생만 남아 폐교 위험에 처해 있다. 이재언 제공

모동리, 부인회 나서 출장소 유치 성공

반면, 모서리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경제활동에 더 눈이 밝았다. 수산업 투자 덩치도 꽤 컸다. 이러다 보니, 도 당국은 인구가 많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모서리에 면사무소 출장소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억척스러운 모동리 부인회가 나서 기금을 선뜻 내놓으며 청사를 지어 기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청사 신축 경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전남도청은 모동리 주민들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모동리에 면사무소를 세웠다. 이후에도 두 마을 사이엔 앙금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갖췄고 항일운동의 흔적도 남아 있는 모서리로선 자존심에 꽤 커다란 상처를 받았을 법하다.

이런 사연을 알고 나니, 대모도의 모서리와 모동리에 좀 더 머물면서 오래도록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같은 섬에 자리잡은 두 마을이기에 형제처럼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낼 법도 한데, 주민들의 처지에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그나마 두 마을을 잇는 도로가 뚫린 뒤로는 과거의 앙금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역시 사람들은 자주 오가고 얼굴을 맞대야 마음을 여는가 싶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travel/825655.html#csidxba8638014f4a18caa8612aa0090b1aa

 

[한겨레 2017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