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단풍은 내장산이나 설악산 등의 단풍과 달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주의 자연 풍광과 어우러져 은은한 자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묘미가 있다. 특히 한라산 영실코스는 언제 가도 좋지만, 영실기암의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는 가을 단풍 트레킹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제주의 단풍은 내장산 단풍 등 육지의 유명 단풍 명소와 비교해 화려하지 않아 단풍만을 보기 위해 제주를 찾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단풍을 볼 수 있고, 또 한라산 등반이나 트레킹을 하면서 단풍을 즐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제주의 단풍 여행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제주 단풍 시기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지만, 요즘은 기후 변화로 인해 단풍 시기가 조금씩 늦춰지고 있고, 고도에 따라 단풍 드는 시기가 달라, 제주에서 단풍을 보려면 여행 시기를 잘 조절해야 한다. 지역별 제주의 단풍 절정 시기는 천아숲길, 천왕사, 한라산 등반 코스, 5·16도로 등 한라산 중턱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 사이, 사려니숲길, 비자림 등 아래쪽은 11월 중순경까지이다. 영실코스 등 한라산 등반 코스가 제주의 단풍을 즐기기에 가장 좋지만, 등반할 처지가 안 된다면, 5·16도로나 1100도로를 달리면서 단풍 숲을 감상하거나,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천아숲길’과 ‘천왕사’ 등을 추천할 만하다.

한라산 영실코스의 단풍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로는 성판악 코스, 관음사 코스, 영실 코스, 어리목 코스, 돈네코 코스 등 다섯 코스가 있다. 이들 코스 중 백록담을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이고, 영실, 어리목, 돈네코 코스는 백록담으로 연결되지 않고, 윗세오름까지만 오를 수 있다. 영실, 어리목, 돈네코 코스가 만나는 윗세오름에서 백록담으로 가는 길이 많이 손상되어,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해 통행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백록담을 보기 위해 한라산을 등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성판악 코스를 선택했었는데, 영실 코스의 아름다움이 알려지면서 2023년부터는 영실 코스를 찾는 탐방객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영실 코스가 시작되는 해발 고도는 1,280미터로 다른 코스들(돈네코 500미터, 관음사 620미터, 성판악 720미터, 어리목 970미터)에 비해 높다. 영실탐방센터를 출발해 소나무 숲을 10여 분 걸으면 나무 계단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계단을 20~30분 정도 걷다 보면 장엄한 영실기암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영실(靈室)이란 이름은 ‘신령이 깃든 방’이라는 뜻인데, 이곳이 아름답기도 하고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설문대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설문대할망이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솥에 빠져 죽었고, 외출 후 돌아온 아들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맛있게 죽을 먹었다. 나중에 귀가한 막내가 죽을 뜨다가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고는 울다가 차귀도에 가서 장군바위가 되었고, 499명의 형제는 영실기암의 오백나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영실코스는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등산객을 반겨주는데, 나무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구상나무들도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분홍빛 물결을 이루고, 구상나무 숲에서 윗세오름 사이 들판에는 고사리, 노루귀 같은 야생화가 피어 꽃길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여름에는 울창한 삼나무 숲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눈과 귀가 시원해지고, 영실기암 맞은편 전망대에 서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 준다.
가을에는 계곡을 따라 노랗고 붉은 단풍 물결이 펼쳐지고, 억새 군락이 은빛 물결을 이루면서 구상나무 숲 사이로 펼쳐지는 가을빛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겨울이 오면 영실기암을 뒤덮은 하얀 눈꽃과 빙벽이 장관을 이루고, 구상나무 위의 눈꽃과 백록담을 배경으로 펼쳐진 초원의 설경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영실코스야말로 언제 가도 좋다고 감히 추천하고 싶은 한라산 최고의 등산 코스다.

천아숲길과 천왕사
천아숲길은 한라산둘레길의 한 구간으로 천아계곡에서 돌오름까지 전 구간(12.7킬로미터)을 걸으려면 편도에만 3시간 30분 내지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천아숲길 전 구간을 왕복하려면 6시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짧게 편도만 걸으려면 버스(240번)를 타거나, 차 두 대를 시작점과 종점 양쪽에 세워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천아’라는 이름은 참나무를 처낭, 처남 등으로 불렀던 제주어에서 유래했는데, 천아숲길은 그 이름에 걸맞게 참나무가 단풍나무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천아숲길 전 구간을 걸으면 한라산의 단풍을 제대로 즐길 수 있지만, 체력과 시간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천아계곡의 단풍만 즐겨도 충분하다. 천아수원지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천아계곡까지 10분 정도 걸으면서 진입로의 단풍을 구경하고, 천아계곡 안의 단풍 숲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천아계곡은 평소에는 물이 흐리지 않는 ‘무수내(건천)’이기 때문에 단풍을 보기 위해 걸어서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비가 오면 급류가 흘러 위험하기 때문에, 비가 내린 후 이틀 동안은 안전상 이유로 통행이 금지되므로 천아계곡 단풍을 즐기려면 날씨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무수내의 특성상 바닥이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라 발목을 보호하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등산화나 트레킹화를 신는 게 바람직하다.
내장산 등 육지의 단풍이 붉고 현란하다면, 제주의 단풍은 노랑과 빨강이 녹색 숲을 배경으로 펼쳐져 조용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천아계곡의 단풍은 계곡 바닥의 돌과 바위 그리고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면서 육지의 단풍 명소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천아계곡이 단풍명소로 유명해지면서 여행객들은 물론 제주도민들도 많이 찾기 때문에 가능하면 평일 아침 일찍 찾는 것이 좋다.
천아숲길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천왕사도 차로 쉽게 접근해서 제주의 단풍을 즐길 수 있는 단풍명소로 알려져 있다. 천왕사는 한라산 어승생 동쪽에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골(구구곡)중 하나인 금봉곡 아래에 위치한 조계종 사찰이다. 천왕사는 1955년 근처 토굴에서 참선 수행하던 비룡스님에 의해 수영산선원이란 명칭으로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천왕사에 가다보면 왼편에 호국원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이 호국원에 제 아버지가 모셔져 있어서 자주 찾아왔었지만, 아버지 기일이 1월로 겨울이라 천왕사까지 들른 적은 별로 없었다. 천왕사와 호국원으로 가는 길에 삼나무 숲이 1킬로미터 정도 이어져 있는데, 그 자체로도 운치가 있다. 호국원 묘역이 있는 곳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시간이 있는 경우에는 묘역에서 참배를 하면서, 묘역 뒤로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천왕사 대웅전 바로 뒤에는 용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대웅전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면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가 절을 했던 곳이 나온다. 천왕사가 단풍으로도 유명하지만, 효리네 민박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천왕사 근처 단풍은 대부분 노란색인데, 천왕사의 단청, 수백 년 묵은 고목들, 커다란 바위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이왕 천왕사를 찾았다면 천왕사 근처의 단풍만 볼 게 아니라, 왕복 2시간 정도 걸리는 석굴암이라는 암자까지 다녀오면 금상첨화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은 어리목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가파른 계단이 많아서 가벼운 산책을 원한다면 그리 권하고 싶은 길은 아니다. 천왕사 입구에는 약수터가 있고, 절 옆의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한라산의 유일한 폭포라는 선녀 폭포가 나온다.

김송호는…
숲해설가이면서 여행 작가(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로 활동 중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 미국, 캐나다, 스위스, 중동, 인도네시아, 몽골 등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트레킹을 좋아해서 지리산 종주를 다섯 번 했고, 지리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 성남 누비길 등을 여러 차례 걸었다. 또 서해안의 백령도, 남해안의 신안, 장사도 등 섬들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다. 제주가 고향이지만 은퇴 후에 제주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아 추자 올레를 포함해서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고, 한라산 둘레길, 사려니숲길, 머체왓 숲길 등 트레킹 위주의 제주 여행을 수시로 다니고 있다. 제주의 숨겨진 아름다운 모습을 알리고자 ‘제주 속살 트레킹 여행’ 밴드를 운영하면서, 매달 다른 주제로 멤버들과 제주 여행을 다니고 있다. 2023년 여름에 다녀온 알프스 트레킹 경험을 담아 『알프스를 걷다』(지성사, 2024년)를 출간했고, 그밖에 『인공지능 공존 패러다임』, 『행복하게 나이 들기』, 『퇴직은 행복의 시작이다』 등 2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이코노미퀸 10월 호]
관련 사이트: Queen 이코노미퀸
제주로 떠나는 단풍 여행
제주의 단풍은 내장산이나 설악산 등의 단풍과 달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주의 자연 풍광과 어우러져 은은한 자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묘미가 있다. 특히 한라산 영실코스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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