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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경고는 공동체의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사적 소유의 방종은 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가져온다는 유럽의 경험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바로 그렇게 망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솔론,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가 호소했던 개혁은 바로 그런 위험의 경고였다.

1949년 5월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 뉴욕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잡지 <먼슬리 리뷰>가 창간되었다. 그런데 창간호의 권두논문이 눈길을 끌었다. 그 논문의 필자가 뜻밖에도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고, 그것은 이 잡지의 사회과학 색채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은 사적 이해에 과도하게 경도된 미국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면서 공동체 이해의 회복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쥔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경고였다. 그의 경고는 당연한 듯 무시되었고 오히려 뒤이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그는 이 글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스로 피난처로 선택한 미국 사회에 대해서 그가 이런 딴청을 피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독일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자란 그가 보기에 사적 이해의 과잉으로 공동체 가치가 밀려난 미국 사회가 매우 위태롭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의 경제제도는 원래 공동 소유에서 시작되었다. 집단을 이루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에서 잠시 사적 소유가 허용되었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사적 소유를 보호해주는 조건에서만 그러했다. 그래서 공동체의 보호막(팍스 로마나)이 사라지자 곧바로 사적 소유는 폐기되고 공동체 소유만 지속되었다. 바로 봉건제도이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이어받아 등장하였고 그것의 사적 소유도 당연히 공동체의 보호막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럽의 자본주의이다.

그런데 미국 자본주의는 봉건제는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해와도 단절된 채 일방적인 식민의 형태로 건설되었고, 따라서 공동체의 보호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채 사적 이해만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미국의 예외주의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방종으로까지 발전하였는데 약탈적 자본가로 이름을 떨친 제이 굴드가 그것을 대변한다. 그는 1886년 자신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 노동자 절반을 고용하여 나머지 절반을 죽여버릴 수 있다.”

미국이 신대륙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그리고 백인들 이전에 그 땅에 살고 있던 약 1300만명의 원주민들이 학살로 겨우 20만명만 살아남을 동안 사적 이해의 이런 방종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4번의 공격으로 10야드의 땅만 빼앗으면 무한히 전진을 계속하는 미식축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메리카대륙의 고립에서 벗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후 세계의 “제국”을 자처하면서 이런 방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공동체의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사적 소유의 방종은 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가져온다는 유럽의 경험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바로 그렇게 망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솔론,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가 호소했던 개혁은 바로 그런 위험의 경고였다.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실제로 빈말이 되지 않았다. 철옹성 같았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은 1970년대 베트남에서 참담하게 무너졌고 경제적 번영도 함께 막을 내렸다. 지금 미국은 자신을 건사하기에도 바빠 세계를 상대로 무역 분쟁을 일으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 경고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울리고 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한진, 삼성, 엘지 등 자본가들의 반사회적 행태가 그것이다. 제이 굴드의 방종을 그대로 본뜬 이들의 행태와 거리낌 없는 범법 행위는 우리의 공동체 이해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려준다. 그 방종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그 해법도 개인적 처벌이나 경영 퇴진을 넘어 사적 소유의 사회적 규제에 있다는 것은 이미 150년 전에 알려졌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공동결정 제도를 통해 생산수단의 사용을 사회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미투, 교육, 일자리 문제의 해법도 모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들 유럽 나라는 알려주고 있다.

그 해법의 방향을 가리킨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고 있다. 공동체의 회복을 밝힌 촛불이 마르크스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를 우리 사회의 자본가들이 때맞추어 애써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역사의 간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4386.html#csidx4905a22b5438060812ce3838b42cc46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한겨레 2018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