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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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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소개/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에 해당되는 글 14

  1. 2014.08.03 [신문기사] 우주만물이 곧 하느님-논쟁보다는 기쁨을 주라
  2. 2014.02.25 과학 원리의 단계
  3. 2014.02.24 과학 법칙은 불변의 진리인가?
  4. 2014.02.20 <과학적인 신> 목차

메튜 폭스1-.jpg

메튜 혹스 신부


메튜폭스 강연1-.jpg

가톨릭회관 대강당에 메튜 폭스의 강연을 들으러온 청중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창조’란 말이 부쩍 떴다. 그러나 그 ‘창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도 안갯속이다. 진정한 창조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해주는 인물이 한국을 찾았다. 미국 오클랜드에 창조영성대학을 설립한 매슈 폭스(74) 신부다. 


그는 여성성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원죄론 위주의 교회를 ‘우주적 그리스도’의 창조적 교회로 변화시켜야 함을 역설하는 개혁가다. 그가 말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란 우주 만생명 자체가 바로 하느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신부로서 34년 동안 지냈으나 그런 개혁적 발언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돼 1995년 축출됐다. 이후 성공회가 그를 영입했기에 그는 성공회 신부다.


 그러나 지난 19~24일 그의 제자 고혜경 박사의 소개로 그를 초청한 것은 가톨릭 쪽이었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 에코포럼의 세시간 강연엔 가톨릭 사제·수녀 100여명을 비롯한 400여명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차 ‘새로운 교회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그는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 <원복> 등을 통해 책으로만 소개됐을 뿐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성가를 지난 23일 한 호텔에서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창조영성가답게 ‘직관’을 중시한다. 그는 “하느님이 매 순간 천사, 즉 직관을 쏟아붓고 있는데 우리가 문을 닫아걸고 있다”며 “직관에 도움을 청하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직관이 가부장적 질서나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때 꽃필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선승다운 면모다. 내공을 갖추고서도 허례 같은 걸 요구하지 않으면 진정한 문답이 가능해진다.


 첫 질문은 그의 전문 특허인 창조성에 대해서다. ‘인간들의 창조성이라는 게 탐욕을 이루기 위해 자연과 생명, 즉 ‘우주적 그리스도’를 해치는 데 더 많이 쓰이지 않느냐’는 거였다.


 “맞다.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핵무기를 만들 때도 창조성이 발휘된다. 인간이 그렇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인간의 악이 모든 동물들의 악보다 더 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를 보라. 그런 파괴적 힘은 다분히 가부장적이어서 소수의 이익만을 섬기는 것이다. 신의 모성성으로부터 나온 창조는 정의와 자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소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명까지 위하는 창조성이어야 한다.”


 폭스 신부는 모성성과 창조성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세상에 더욱 확산되어가는 ‘근본주의 경향’을 꼽는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인 근본주의에 대해 그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위에 깊은 참호를 파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스컴과 인터넷으로 세상이 동시에 소통되고 있는데 왜 근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질서와 통제만을 선호하고, 혼돈을 싫어한다. 질서와 통제가 극대화한 사회가 파시즘이다. 옛날엔 혼돈을 여신과 동일시했다. 혼돈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아이가 태어날 때 보라. 피범벅이 되어 혼돈 그 자체다. 생명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혼돈을 싫어해 여성성의 발현을 이단이라며 마녀사냥을 했다. 동성애자나 성소수자도 핍박한다.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다. 본래 자연 그 자체는 다양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는 것도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 때문이다. 그는 “전임 두 교황(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도 16세)은 이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적으로 열려 있으며, 다양한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는 근본주의적 종교재판의 희생양이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선 부정과 군사기지 건설, 환경 파괴 등에 반대해 정의를 외친 신부·수도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종북’으로 비판을 받는데,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느냐”고.


 “예언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소수 권력자를 만족시키는 현 체제는 당연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물건너간 것이고 핍박을 자처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랬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어서까지 3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에크하르트도 그토록 비난을 받았고, 힐데가르트 수녀도 700년이나 유폐됐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반대한 시위에 나섰을 때 흑인 목사들조차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비난했다. ‘설사 상사가 잘못된 일에 동조하라고 하더라도 양심에 따라야 한다’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현시대의 응원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 그런 위대한 선조들과 순교자들, 예언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누구도 수동적으로 있어선 안 된다”는 행동파다. 억압받고 창조성을 억누르면 우울해지고 비관주의만 팽배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와 통제의 우상인 가부장적 하느님이 아니라 모성적인 창조적, 우주적 하느님을 발현해 가라고 독려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직관적 창조주의자다운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는다.


 “가능성, 즉 대안이나 출구가 없을 때 절망하게 된다. 예언자들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논쟁과 비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위기를 타개할 대안을 만들어내고 조직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논쟁보다 기쁨을 좋아한다. 좋아한 것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창조적이니 못할 게 없지 않은가.”


 (한겨레신문 2014년 7월 31일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과학 원리의 단계

일반적으로 과학 원리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어떤 경우에는 ‘~~ 법칙’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론’, ‘~~론’ 또는 ‘~~설’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일반상대성 이론, 진화론, 지동설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법칙을 붙이고, 어떤 경우에 이론, 론, 설 등의 말을 뒤에 붙이는가?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글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여기 피력하고자 한다. 우선 법칙은 확고한 원리로 인정받는 경우에 붙이고 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물질 보존의 법칙’ ‘열역학 법칙’ 멘델의 ‘유전 법칙’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물질보존의 법칙의 경우만 해도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라고 생각한 고전물리학에서는 법칙으로 성립이 되었지만, 물질과 에너지가 상호 전이가 가능하다는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고 나서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에너지까지 물질 보존의 법칙에 고려하고, 물질까지 에너지 보존 법칙에 고려한다면 이 두 가지 법칙은 여전히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법칙이 보통 관찰된 비교적 단순한 현상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체험을 경험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라면,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보다 폭 넓게 적용하기 위하여 가설을 세워 만들어낸 논리체계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당연시 했던 절대공간, 절대시간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우주에 대한 관찰 결과에 더 적합하도록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뉴턴의 고전역학 법칙들을 풀 수 있다. 다시 말해 뉴턴역학은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즉 계산하는 조건을 우리 일상생활의 인식범위로 한정하면 상대성 이론과 뉴턴역학은 거의 결과가 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뉴턴역학은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맞지 않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잘 들어맞기 때문에 아직도 유효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뉴턴역학이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풀 수 있기 반면에, 상대성 이론은 전문가 수준에서만 풀 수 있기 때문에 아직도 뉴턴역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첨단 과학기술이 일상생활에 점차 많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뉴턴역학보다는 상대성 이론을 적용해야 될 경우가 점차 늘어가고 잇다. 예를 들어 요즘 일상화되고 있는 GPS을 통해 자동차 위치를 계산할 때 뉴턴역학만 적용하게 되면 하루 수 킬로미터의 오차가 생기게 된다. 물론 현재 GPS를 통해 자동차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성 이론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이론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어떤 가설을 통해 관찰된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 이를 보통 ‘~~론’이라 칭하게 된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진화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과학적으로 봤을 때 진화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만한 확실한 근거는 아직도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화론이 옳으냐, 창조론이 옳으냐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화론의 근거로 화석 등의 자료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동종 생물의 차이를 들고 있지만, 진화론을 반박할 자료들도 만만치 않게 많이 있다. 진화론의 가장 큰 취약점은 과거의 현상을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더불어 생물의 다양성이라든가, 복잡하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생물체가 어떻게 우연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성경을 절대적인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는 창조론의 경우에도 명확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근 대두되고 있는 ‘성경이 비유적 해석’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이를 과학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보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3부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예를 들어 시간이라는 단위가 빅뱅 초기와 앞으로 열적 죽음에 도달할 먼 훗날에 현재와 똑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과학적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에 기술된 하루가 현재의 기준으로 계산된 하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에 기술한 창조론도 과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론적인 근거나 체계가 부족하지만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을 ‘~~설’이라고 한다. 대개 ‘~~설’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같이 진화 현상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여서 제시됐지만, 맨델의 유전법칙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성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보다 강력한 근거가 제시되면서 ‘~~론’이나 ‘~~법칙’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원자설’과 같이 고대 그리스에서 데모크리토스에 단순히 개념적으로 제시 되었지만 차후에 실험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면서 ‘원자론’으로 격상된 경우도 있다. 사실 ‘~~설’은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그대로 단군신화설과 같이 누구나 그 자체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경우도 있고, ‘~~카더라’ 수준의 논란거리 제공을 함으로써 차후 증명을 요하는 모든 경우를 포함하게 된다.

법칙을 주로 많이 사용하던 시기는 고전물리학이 완성되기까지인 19세기 말까지다. 실제로 19세기 말에는 자연현상을 모두 이해했으니 물리학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전물리학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20세기 초반에 들어오면서 고전물리학 자체 모순에서 비롯한 심각한 문제가 알려지게 되었다. 즉 유명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이론 확립으로 고전물리학은 극히 제한된 조건 하에서만 성립하는 법칙임이 밝혀졌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 범위 안에서는 고전물리학이 성립되지만, 우주와 같이 아주 거대한 대상이나 원자와 같은 아주 미세한 대상에는 고전물리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칙’이란 용어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는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을 벗어난 새로운 법칙이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과학법칙도 나중에 부정될 수 있다면 과학법칙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 불확실성 하에서 과학법칙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학의 속성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견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과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우리의 인식작용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과학법칙의 불확실성을 우리의 인식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과학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기존의 과학법칙을 적용해서 현상을 예측하고 대응하되, 다른 현상이 발생할 경우에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해서 과학적 사고라고 부르는데, 이 ‘과학적 사고’는 중요하기 때문에 뒤에 별도로 다루기로 하겠다.

‘과학은 객관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과학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데, 현재는 이러한 과학적 실재론은 받아들이지 않는 게 대세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해석이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현대는 대체적으로 상호주관성을 통해 과학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추세다. 상호주관성이란 대다수 과학자들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방식, 즉 실험, 관측과 논리적 추론을 통한 검증을 거쳐 상호 인정하면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과학 활동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우리의 인식작용이라면, 이는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대다수 과학자들이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과학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 일반적인 과정은 과학 잡지 또는 기술 잡지에 기고하여 심사를 받으면서 1차로 다른 과학자들의 검증을 받고, 발표된 논문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확인 작업을 거치면서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게 된다. 현재 매년 수십만 편의 학술 논문이 발표되지만 수 년 후 과학 집단 내에서 인정되어 과학적 사실로 수용되는 내용은 10퍼센트 미만이다. 사실 과학이 발전한 이유는 미신이나 종교를 타파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과학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였기 때문이다.

제1장 과학 법칙은 불변의 진리인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다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연과학에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과학은 자연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객관적 진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과학 자체가 자연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모든 사실들이 절대적인 객관적 진리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즉 자연은 객관적일 수 있겠지만,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 때문에 자연을 해석하는 활동인 자연과학은 완벽할 수는 없다. 사실 이미 세웠던 자연과학 법칙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칙을 세우는 경우도 이런 인간 인식의 범위가 늘어난 게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천동설만 해도 우리의 경험상으로는 천동설이 맞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달도 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도의 인식 범위 안에서는 천동설이 맞는다. 그런데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사람의 인식의 한계가 넓어지고, 별들의 움직임을 보다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지동설이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식의 한계가 넓어진 것뿐만 아니라, 수학적 지식과 뛰어난 사람들의 영감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 시발은 인식의 범위가 넓어진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

사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상당히 좁은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인간 눈의 망막은 단지 400∼700나노미터에 해당하는 빛만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청각 범위는 2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초당 공기 압축 주기)이다. 따라서 400나노미터 이하의 빛은 자연에 존재하더라도 인간은 인식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는 측정 기기의 발달로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외선 탐지기를 통해 인간이 보지 못하는 적외선을 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원자 단위의 측정에서는 측정 자체가 존재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측정의 불확실성이 커지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알려진 이런 측정 오차는 자연 법칙의 근간이 되는 측정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얻어지는 측정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다면 그에 기반 하여 성립된 자연 법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나마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측정 장치를 통해 부정확한 데이터라도 얻을 수 있는 경우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물질은 5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95퍼센트는 그 존재만 짐작할 뿐, 그 특성을 전혀 모르는 물질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불리는 이 물질들은 계산상에서만 존재가 추정되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재의 측정 장치로는 측정이 되지 않는 미지의 물질인 것이다. 이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해와 실제 관측 결과와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하여 도입된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나서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우주가 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상대성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면 우주에 퍼져 있는 물질들의 중력 작용에 의해 우주는 다시 수축해야 했다. 그래서 정적인 우주를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 방정식에 람다라는 항을 더 넣어서 우주가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수정했다. 하지만 나중에 허블에 의해 우주가 팽창하는 것으로 관측되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상대성이론 방정식에 람다라는 항을 넣은 것이 자신의 최대 실수였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의해 나온 결과를 살펴보고 우주가 정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나왔으면 왜 그런가를 살펴보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는 상대성이론 방정식에 오히려 두 개의 항을 넣어서 보정하고 있다. 하나는 암흑물질에 대한 항이고, 다른 하나는 암흑에너지라고 명명된 항이다. 암흑물질은 중력으로 작용하고, 암흑에너지는 오히려 팽창시키는 작용을 한다. 상대성이론 방정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5퍼센트에 불과하고, 암흑물질이 23퍼센트, 암흑에너지가 72퍼센트를 차지해야만 현재의 우주 상태와 일치한다고 한다. 여기서 암흑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까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정확히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치 우주를 다 이해한 것처럼 떠들지만 실제로는 5퍼센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이유다. 아니 어쩌면 현대과학은 우주에 대해 5퍼센트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현대 과학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인식 능력의 한계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고 있는 북극성은 1000년 전의 북극성이다. 북극성에서 나온 빛이 1000년을 지나 우리에게 도착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정확한 북극성의 위치를 우리는 인식할 수가 없다. 아마 지금은 북극성이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북극성의 상태를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추정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현재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재 상태라는 것은 관측에 소요되는 시간이 무시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관측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빛의 속도가 지구에서는 이런 전제 조건을 충족하지만, 우주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에서 관측된 사실은 시간이라는 척도를 고려하여 이론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거시적인 우주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원자 단위 이하의 미시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원자 단위에서의 관찰에서는 관찰 자체가 존재에 영향을 미쳐서 관찰이 부정확해지는 이른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튼 원자 단위까지는 관찰이 부정확하더라도 어쨌든 관찰이 가능하지만, 그 이하의 단위에서는 직접 관찰보다는 간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계산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를 구성하는 중성미자, 바리온, 메존, 렙톤, 쿼크 등 기본입자들의 존재는 직접적인 관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론물리학과 입자가속기를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미시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거시 세계에서 적용되는 과학 원칙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로는 중성미자 등의 기본입자의 성질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미시 세계를 서술하기 위해서 도입한 이론이 양자 역학이다. 양자 역학은 거시 세계에 익숙한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여러 특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물체의 위치가 확정적이라고 전제하지만, 양자 역학에서는 기본입자의 존재 위치가 확률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 모두에 적용되는 통일된 이론이 아직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의 존재가 우리의 상식과 벗어나기 때문이다. 즉 미시 세계로 가게 되면 입자는 점으로도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입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거시 세계의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본입자를 점이 아닌 작은 끈으로 간주하는 ‘끈 이론’이 등장했다. 끈 이론은 기본입자를 일정한 에너지를 가진 작은 끈의 형태로 보고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끈 이론은 4차원으로 표현되는 현실 세계보다 훨씬 많은 11차원 내지 12차원의 세계가 나타나는 등 현재로서는 풀기 힘든 난제를 안고 있지만, 미세 세계와 거시 세계를 동시에 풀 수 있는 강력한 후보 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끈 이론이 이처럼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이유는 에너지와 물질의 중간 형태를 합리적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물질도 에너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거시 세계에서는 물질과 에너지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와 물질의 경계선 상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눈에 보이는 세상도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라는 사실만 알아도 과학과 종교에 대한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처럼 인간의 과학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봐야 한다. 최근에만 이런 착각을 한 것도 아니다.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표하고 나서 모든 행성의 운행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이제 더 이상 과학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뉴턴의 법칙은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법칙으로, 더 이상 절대적인 법칙으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과학 법칙들이 나중에 진리라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과학이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고, 종교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대망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과학과 종교

- 과학이란 무엇인가?

- 종교란 무엇인가?

- 과학과 종교는 대립하는가?

- 세상을 지배하는 엔트로피법칙

- 빅뱅 이론: 세상은 에너지다

- 과학적인 관점에서의 신

- 과학이 신을 대체하는가?

제2부 진화론과 창조론

- 진화론의 대두

-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 진화론과 창조론에서의 인간의 지위

- 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종교

- 왜 진화론이 대세가 되었는가?

제3부 과학적인 신의 관점에서 본 교리의 재해석

- 기적은 비과학적인가?

- 세상의 창조

- 말씀이 사람이 되다

- 삼위일체

- 기도의 힘

- 출생과 죽음

-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원죄와 선악과

- 부활

- 영혼, 마음, 인식, 뇌

- 불교의 업

-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인간, 본래 부처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인드라망

제4부 과학적인 신의 관점에서 본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재해석

- 복지

- 자유와 평등

- 성장과 분배

- 네트워크 경제

- 공유, 공동체

- 환경보호

- 선과 악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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