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은퇴후 남는 20만시간…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전 꼭 해보고 싶은 일 목록) 만들자
하고싶은 일은 다 하자
40~50代 버킷 리스트 보니 - 대다수 여행·봉사활동 꼽아… "해탈" "오로라 보고싶다"도
"알아야 할 수 있다" - 여행이든 봉사든 모르면 못해… 신입생처럼 지금부터 공부를
오후 11시, 김재민(60)씨는 두꺼운 침낭을 여미며 잠에 든다. 해발 1300m 네팔 둘리켈의 겨울 밤은 춥다. 건기(乾期)라 수력 발전할 물이 없어 하루 중 절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다.
오전엔 네팔 카트만두 국립대학 컴퓨터학과 학생들에게 IT 기술을 강의하고 오후엔 대학 내 원격 학습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하는 그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대외 무상협력사업을 하는 정부출연기관) 봉사단원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장님이었다. 1997년부터 2년 동안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이사를 지냈고, 그 뒤엔 다른 IT 업체 두 개의 CEO를 지냈다.
- 지난달 25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캠퍼스에 경희사이버대 재학생 정흥섭(61), 박종열(62), 윤필화(60), 오옥희(60), 신순호(61), 최현구(73), 정인길(67)씨(왼쪽부터)가 모였다. 이들은 “나이 드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제대로 하려면 공부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대학생이 됐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2008년 은퇴한 뒤 몇 달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우연히 신문에서 KOICA에서 네팔 IT 봉사단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무릎을 쳤다. "네팔에 가야겠다." 그래서 네팔로 온 지 1년이 넘었다.
만일 60세에 은퇴해 많으면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은퇴 이후 남는 시간은 약 35만 시간이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등을 빼면 20만 시간 정도가 남는다. 이 시간은 어떻게 보면 매우 특별한 보너스이기도 하다.
직장에 얽매였던 좁은 나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면서 오롯이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본지와 삼성생명이 은퇴를 앞둔 40~50대 전국 남녀 500명에게 물었더니 '은퇴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70.4%, 복수응답)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그들에게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일'을 물어봤다. 영화 제목으로 유명해진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작성해 보라고 한 것이다. 주관식 질문에 '북극의 오로라를 보고 싶다', '해탈하고 싶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다' 등 예상치 못한 답변들이 쏟아졌다.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역시 여행(35%)이었다. 이어 종교·봉사활동(18.5%), 공부(6.5%), 스포츠(6.3%)가 뒤를 이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인터넷으로 공부하기 위해 경희사이버대학에 등록한 재학생이 65명이나 된다. 이들에게 '공부'는 버킷리스트의 첫 번째 항목이자 다른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본지는 이들 중 40명을 전화로 인터뷰했는데(40명 중 27명은 은퇴자), "왜 환갑 넘어서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라는 대답이 18명으로 가장 많았다.
외식농수산경영과 09학번 박종훈(61)씨는 "비누 공장을 하다가 사양산업이라 접었는데, 나에게 시간이 앞으로 25년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말 주민센터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신순호(61)씨는 동남아에서 온 다문화가정 민원인들과 말이 안 통해 쩔쩔맸던 경험이 많아 퇴직 후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보자는 맘으로 한국어문화학과를 택했다.
최고령자인 미국학과 11학번 유한옥(74)씨는 퇴직 후 12년 지나서야 대학 신입생이 됐다. 그는 "은퇴해 보니 가장 중요한 게 삶의 질이더라"며 "관(棺) 속에 들어갈 때까지 공부하는 게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좋은 길인 것 같다"고 했다.
이금룡 상명대 교수(가족복지학)는 "버킷리스트 10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은퇴 설계를 향한 첫 단계"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2년 1월 3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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