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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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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여름 편지] 욕심 밀어내고 자유만 허락된… 꿈같은 마을에 함께 가요, 우리 -김선우 시인

사랑하는 당신.

아픈 당신 때문에 나는 날마다 마음을 졸입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당신의 안부부터 묻습니다. 당신의 병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일테면 유마의 병. 아름답고도 모골 송연한 법어를 들려주는 '유마경'의 유마처럼, 세상이 아파서 당신이 아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래 흐렸던 하늘이 걷히고 남국의 햇살 같은 신선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나는 모처럼 들뜬 마음이 되어 당신에게 전화합니다. "나을 수 있어요.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당신이 병상을 박차고 나오면 우리 그곳에 함께 가요." 당신은 희미하게 웃습니다. "그렇게 멀리까지는 못 가요. 게다가 비행기라니요." 그제야 나는 당신에게 약간의 폐소 공포증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럼 배 타고 가면 되지요!" 빽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상상합니다. 화창한 여름 햇살처럼 몸이 맑게 갠 당신이 뱃전에 부서지는 인도양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는 것을.


김선우 시인(사진 왼쪽 아래)과 오로빌의 영혼으로 불리는 원형의 명상공간 마트리만디르(Matrimandir). /김선우씨 제공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작은 마을 오로빌(Auroville). 내가 한 달 반가량 머물며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했던 그곳은 물질적 규모로는 자그마하지만 영혼의 규모로는 아주 큰 마을이었어요.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2100여명의 주민들이 생태적이고 영적인 삶을 모색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마을. 40여 년 전 붉은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황무지였던 그곳에 어린 묘목을 심고 가꾸면서 지금은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숲이 된 곳. 선의와 우정의 마음이 인류의 영혼을 조화롭게 진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속도 속에서 스스로를 고갈시켜가는 자본주의적 풍요 대신 자발적 가난을 선호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났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당신과 함께 다시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꽃으로 만든 거름을 내게 선물해주었던 오로컬처에게 당신을 제일 먼저 소개해주고 싶어요. 떨어진 꽃을 주워 만다라를 만들고 그것이 향기로운 거름이 되도록 돕는 오로컬처. 꽃나무 아래 떨어진 자디잔 열대의 꽃을 일일이 줍느라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나무 아래 넓은 천을 깔아놓으면 어떠냐고 제안했지요. 밤새 꽃들이 천 위로 떨어지면 걷어서 그대로 사용하면 될 테니까요. 그때 오로컬처가 말했어요. "꽃들은 어머니 대지에 입맞추고 싶어한답니다. 나의 일은 그 후의 것이지요."

당신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을을 산책하고 싶습니다. 모터 달린 자전거로 그곳에서 처음 배운 모페드 뒷자리에 당신을 태우고 숲 가꾸기 커뮤니티인'사다나 포레스트'까지 달려보고 싶습니다. '모두를 위하여'라는 이름의 수퍼마켓 물건들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합니다. 내가 '해님식당'이라 부르던 솔라키친은 돈을 지불하지 않는 식당이자 태양열로 모든 음식을 조리하는 곳인데 당신도 나처럼 그 식당을 좋아할 게 틀림없어요. 세계 124개 나라에서 온 흙이 한곳에 묻혀 있는 원형광장의 붉은 아그라석을 밟으며 천천히 명상하고, 석양 아래 타고르와 간디와 오로빈도의 시를 읽고,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쓰고 타인을 위해 많이 나누는 것이 사업을 해 돈을 버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오로빌의 사업체들.

꿈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하기 쉬운 그런 '꿈'을 실제로 실험하고 있는 마을이 지구 한 녘에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말합니다. 그렇지요, 꿈 없이, 사랑 없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당신을 염려하는 나에게 당신이 들려주는 노래 속으로 아름다워진 햇살이 맑게 차오르는 것을 눈부시게 바라봅니다.

(조선일보 2011년 7월 19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