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왜 이렇게 힘들까요? 팍팍한 인생 토닥였던 책
팔리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의 양극화가 극심했던 한 해였다. 조선일보 Books팀은 '2012년 올해의 책 10권'을 선정했다. 선정된 작품은 논픽션 8편과 픽션 2편.
'2012 올해의 책' 선정에는 23개 출판사 대표와 편집장, 출판 전문가 3명, 온·오프라인 서점 관계자 4명 등 30명과 조선일보 문화부 문학, 학술, 출판 담당 기자 7명이 참여했다. 이들로부터 올해 독서계 흐름을 이끌었던 책을 5권씩 추천받았고 득표 순으로 10권을 골랐다. 긍정주의 성공신화에 던지는 경고장에 '피로'라는 절묘한 이름표를 붙인 '피로사회'와 일반인들이 느끼는 소심함에 대한 통념을 깬 '콰이어트'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힐링' 열풍을 반영하듯 현대인의 아픔을 분석하고 어루만지며 용기를 북돋우는 책이 다수 포함됐다.
긍정의 과잉 시대… '자기 착취'를 향한 직언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28쪽|1만원
열풍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현대인의 '긍정주의 성공 신화'에 던진 이 경고장에 올 한 해 수많은 독자들이 열광했다. 철학서로는 이례적으로 4만2000부가 팔렸다. 출판인들은 "올해 인문서 출판의 사건" "가벼운 대중 인문서가 판치는 시장에서 정통 인문서로 폭넓은 층의 호응을 받은 책"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문을 연다. 우울증은 긍정성 과잉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질병. 한 교수는 현대사회를 '성과 사회' '자기 착취 시대'라고 규정한다. "곳곳에서 '넌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과도한 긍정성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도 스스로 착취한다는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쏟아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삶을 소진하게 만드는 성과사회의 폐해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현대사회를 '피로'라는 키워드로 절묘하게 분석한 책. 얼마 전엔 국내 출판인 18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8대 대통령 당선자에게 주고 싶은 책' 1위로 꼽혔다.
소심해도 괜찮아… 내향적 사람들에 대한 옹호
콰이어트
수전 케인 지음 |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480쪽|1만4000원
'소리 없이 강한' 책이었다. 올해 국내 독자와 해외 독자가 함께 지지를 표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1월 말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고 국내에는 6월 말 번역됐지만 동반 상승세를 탔다. 14일 현재 교보문고 집계 종합 48위, 온라인서점 예스24 집계 86위. 아마존닷컴 종합 부문에서도 74위로, 314일째 10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화려한 외향성의 시대에 가위눌린 내향성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과학적 근거를 통해 옹호하고 위로하고 격려한다. 읽다 보면 '소심함=사회 부적응'이라는 통념에 눌려왔던 마음 한구석이 가뿐해진다. '사람들의 3분의 1 내지 절반가량이 내향적'이라는 본문의 인용구를 생각하면 '사실은 내 얘기'라며 책을 펴들었을 독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책벌레에다 수줍음 많던 소심쟁이에서 하버드 로스쿨을 우등 졸업하고 기업 변호사로 성공한 저자의 체험담이라 호소력이 있다. 비폭력 운동의 지도자 간디, 미국 민권 운동의 대모인 로자 파크스 등의 역사적 일화에서부터, 무대 울렁증은 수십만 년 진화 과정에서 포식자의 눈빛을 의식해야 했던 잔재라는 진화생물학의 흥미로운 학설까지 내용들도 다양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땅의 직딩이여, 完生하는 그날까지…
미생
윤태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4권까지 출간 | 각권 1만1000원
샐러리맨의 치열한 일상을 바둑에 빗대 풀어낸 만화 '미생'은 요즘 '직딩(직장인) 필독 만화'다. '이끼'의 작가 윤태호가 인터넷에 1년째 연재 중인 웹툰.
미생(未生)은 '아직 살지 못한 자'라는 바둑 용어다. 프로기사 입문에 실패해 완생(完生)을 이루지 못한 '고졸 백수' 주인공이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해 겪는 각종 에피소드를 담았다. 잘되면 제 덕, 못되면 부하 탓하는 부장, 항상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일에 매달리는 워커홀릭 과장…. 바둑의 상황에 빗댄 캐릭터들에 열광하는 30~40대 직장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만화로는 유일하게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대한민국에서 샐러리맨이 생을 얻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만화"(이지영 예스24 도서팀장), "오피스 라이프의 결을 기막히게 짚은 데다 화이트칼라 판타지를 입힌 매혹적인 인생 만화"(박정남 교보문고 MD팀 과장)라는 평이다.
일상어로 위로하는 미남 스님에 세상은 열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92쪽|1만4000원
지난 1월 27일 발행돼 32주간 베스트셀러 1위(출판인회의 집계) 자리를 지켰다. 판매량은 총 145만부로, 1쇄 3000부가 하루 만에 소진됐다. 한 달 만에 10만부가 나갔고, 8월엔 인문교양서 최단기간 100만부 돌파 기록을 세웠다. 올해 '혜민'과 '멈추면…'은 하나의 '패션'처럼 소비됐다.
젊고 미남인 저자 혜민 스님은 미국 최고 명문대 석·박사학위를 지닌 현직 미 대학교수이고, 팔로어 32만명을 거느린 트위터 스타. 스님 본인은 "얼떨떨하다. 통상 '산속 수행승' 이미지와 달라 새롭게 받아들여진 듯하다"고 말한다. 출판계에선 "세속의 언어로 일상의 고통에 주목한 책" "시대적 갈증에 대한 진통제" 등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친구나 오빠 같은 느낌을 주는 목소리·말투가 책에서 받는 느낌과 꼭 닮아서, 그의 강연에도 구름 청중이 몰렸다. '멈추면…' 열풍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치유'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현상이기도 했다.
자기 찾기는 그만… 나를 잊어야 행복해진다네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지음 | 송태욱 옮김 | 사계절|201쪽 | 1만1500원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4년 전 펴낸 '고민하는 힘'보다 심각해졌다. 지진, 방사능, 금융 파탄, 실업…. 한 해 3만여 명이 고독사(孤獨死)하는 일본은 자긍심 넘치던 과거의 그 나라가 아니다.
이 책은 행복이 무엇이고 인생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캐묻는다.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사회학자 막스 베버,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답을 찾는다. 종교에서 분리되면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했고, 자의식의 과잉이 고뇌를 낳았으며, 해결책은 '자기 찾기'가 아니라 '자기 잊기'라는 것이다. 강상중은 "불안의 냄새를 풍기며 광고와 상품으로 '자기를 찾으라'고 부추기는 게 바로 자본주의"라고 짚는다. 박신규 창비 문학출판부장은 "저자 특유의 통찰이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고 평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자"고 청하는 책이다.
현실 정치에 지친 이들 위한 '선거의 해 기획본'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지음 | 제정임 엮음 | 김영사|276쪽1만3000원
안철수 전 대선 후보가 '링'에 오르기 전인 지난 7월 전격적으로 펴내 화제가 된 대담집. 5개월 동안 70만부(1분에 11권꼴) 이상 팔리며 '안철수 현상'을 증명했다. 정치 참여에 대한 고민부터 인간 안철수에 대한 궁금증, 사회적 쟁점에 대한 견해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이 출간된 뒤 제목에 '안철수'를 박고 나온 책이 30여 종에 달했다. '특정 책에 대한 책'이 쏟아진 셈인데, 칭송도 있었지만 돌팔매도 있었다. '유일한 희망'인 동시에 '위선과 기만'으로도 읽혔고, "썩은 동아줄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거리를 두는 반응도 많았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책을 "정치 피로감에 지친 독자들의 열광에 힘입어 역대 최대 풍속으로 팔려나간 '선거의 해' 기획본"이라고 규정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열망과 한계, 정치출판과 출판정치의 간극을 동시에 보여줬다"고도 했다.
김정운, 13명의 사내들 '물건'을 평가하다
남자의 물건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335쪽|1만5000원
'재미'를 추구하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도발한다. "당신도 정치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좀 해봐!"
각계 남성 명사 13명이 각자의 물건, 즉 애장품을 내놓고 김정운과 인터뷰를 했다. 학자 이어령, 대학교수 신영복, 축구선수 차범근, 배우 안성기,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 화가 이왈종, 소설가 박범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가 풍성하다.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곧 그들의 삶이다. 언어를 다스리는 장군인 이어령에게 '3m짜리 책상'은 사열대와 같고, 아내와 세 아들 모두와 함께 했던 독일에서의 아침식사를 든든한 추억으로 간직한 차범근에게 '계란 받침대'는 행복의 증거물이다. 소설가 박범신이 왜 '목각수납통'을 앞에 두고 목수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는지, 조영남이 왜 '네모나고 각진 안경'만 고집하는지 들려준다. 저자 특유의 통쾌한 입담과 예리한 통찰이 빛나는 책.
근현대 유럽문화를 싹~ 훑었다… 박람강기의 표본
유럽문화사(전5권)
도널드 서순 지음 | 오숙은 등 옮김 | 뿌리와이파리 | 각권 2만8000원
1800년부터 200년 동안 유럽인들이 생산·유통·소비해온 문화 형식을 총망라한 책이다. 저자는 고급과 저급으로 문화를 서열화하는 대신 "누가 문화적 가치의 위계와 정전(正典)을 정하는가"라는 구성주의적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 신화를 만든 마케팅, 나치의 '라디오 집착', 예측불허였던 톨스토이 문학의 소비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럽 역사학계에서 홉스봄의 후학으로 소문난 저자 서순은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사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고영은 뜨인돌 대표는 "앞으로 이 책을 넘어서는 유럽 문화사는 나오기 어렵다"면서 "소장하면 흐뭇하고 완독하면 뿌듯한 박람강기(博覽强記)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1800년의 귀족이 2000년의 평범한 상점 점원보다 문화적으로 더 궁핍했다는 혜안은 단순한 진보주의자의 관점이기보다는 인류학적 사유의 풍요로운 편린을 드러낸다"(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평도 있다.
문학상 3관왕이 만든 어떤 유머와 넋두리의 세계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장편소설 | 문학과지성사 | 294쪽|1만1000원
2012년 한국문학의 명실상부한 주인공. 한 해에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내리 받았다. 같은 작품으로 3관왕은 한국문학에서 전례 없는 일. 당연히 동료 작가들의 애정 어린 질투와 시샘이 작가 정영문(47)에게 집중됐는데, 대중의 관심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꼭 질투와 시샘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문학상 그랜드슬램' 후광에도 불구하고 총 판매부수가 1만부가량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어떤 작위의 세계'의 만연체를 빌리자면, 이 작품은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재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생각을 비우고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다 보면, 피식피식 웃다가, 어느 순간 포복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특이한 매력의 작품.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소설만 소설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문학적 복수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의도적으로 버리고, 17개의 작은 이야기를 통해 삶의 덧없음을 간결하고 유머러스한 넋두리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욕망을 욕망한다고 왜 말을 못해!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지음 | 창비| 312쪽 | 1만3500원
권력·학벌·돈·섹스 등등 한 번도 대놓고 말하지 못한 은밀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검사 출신 법학 전문가인 저자는 먼저 자신의 '욕망'부터 고백한다. '글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망, 그럼에도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욕망…. 누구에게나 있지만 선뜻 인정하지 못하는 욕망들에 대해 고해성사에 가까운 본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대범함이 돋보인다.
책은 신정아 사건, 상하이 영사 스캔들 같은 사건에서 우리 사회의 집단폭력 양상을 꼬집고 플레이보이·모텔·학벌·중산층 문화까지 다양한 욕망을 훑는다. "솔직히 인정하고 드러내야 건강해진다"는 게 요지.
"인문사회적인 문제의식을 일상적인 에세이 형식의 인생론으로 풀어내는 인문서 출판의 한 트렌드를 이끈 책" "소설가와는 다른 이야기꾼이자 성찰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 저자의 필력도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선정위원 명단]
강무성 열린책들 주간, 강심호 살림 기획국장, 고영은 뜨인돌 대표, 기라미 인터파크 MD, 김기중 더숲 대표, 김성구 샘터 대표, 김수진 푸른숲 부사장, 김현숙 궁리출판 편집주간, 박시형 쌤앤파커스 대표, 박신규 창비 문학출판부장, 박윤우 부키 대표, 박종만 까치글방 대표, 박하영 알라딘 팀장, 박희진 한길사 편집부장,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양원석 알에이치코리아 대표, 이지영 예스24 도서팀장, 이진숙 해냄 편집장, 박정남 교보문고 MD팀 과장, 주명석 21세기북스 본부장, 장은수 민음사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조건형 사계절 인문팀장, 조미현 현암사 대표,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차재호 더난 편집장, 최연순 김영사 편집주간, 표정훈 출판 평론가, 허병두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홍정선 문학과지성사 대표(가나다 순)
(조선일보 2012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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