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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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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다

2015. 2. 13.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행복한 엔지니어의 뉴스레터 (제 315 호)

 

【 말씀이 사람이 되다 】

 

사(4) 복음서 중의 하나인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요한복음 1장 1-4절)로 시작이 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다른 세(3)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신적 성품을 강조한 독특한 복음서입니다.

 

보통 어느 책이나 첫 구절에 가장 핵심적인 얘기를 써놓는데,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에 예수를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를 번역한 것인데, 다바르는 단순히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위와 행동을 내포하기 때문에 다바르는 창세기 첫 장의 하느님의 창조력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의 전 생애와 임무를 우주론의 배경 안에 놓고, 그리스도가 천지창조 때에 하느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로고스 또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서의 말이 바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신, 즉 만유내재신을 직접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태양광선 하나하나가 바로 태양이듯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빛이-하느님 전체는 아니지만-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하느님인 예수를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이 과학적인 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제가 말씀드린 과학적인 신은 목적의식을 가진 에너지인데, 이 에너지, 즉 신 자신이 신의 목적에 따라 실체를 갖춘 것이 만물입니다.

빅뱅 이전에는 에너지 형태로 존재하던 신이 빅뱅 이후에는 에너지를 물체의 형태로 변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보내 드린 뉴스레터에서도 간단히 설명 드렸지만, 열역학 법칙에 의해 이 세상의 에너지는 빅뱅 이전이나 이후에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에너지의 형태가 바뀌고,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되는 과정만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갖고 변하는 에너지가 신이라는 것이 제 주장이며, 이렇게 나타나는 신의 모습을 과학적인 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이 바로 과학적인 신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결국 에너지이지만,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라 어떤 목적에 의해 표현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어의 다바르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행위와 행동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를 생각해보면 좀 더 확실하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할 때는 에너지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말은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행해지는 행동입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즉 어떤 특정한 목적 없이 소리만 나는 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은 만유내재신, 즉 과학적인 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에 의해 창조된 우리, 더 나아가 만물도 말씀, 즉 신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가 특출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인데 우리 스스로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 자신이 왕족처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루가복음(11장 27-28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당신을 낳아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하고 외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대답하셨다.”

즉 육신을 가진 예수의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신(하느님)임을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자신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이 세상에 왔듯이, 우리가 하느님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만드는 기술자

 

김송호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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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발송되었던 뉴스레터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제 개인 블로그 http://happyengineer.tistory.com/의 <주간 뉴스레터>나 http://www.linknow.kr/group/happygroup의 <행복한 엔지니어의 뉴스레터> 목록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본 주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저에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글을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