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도 돈대산 도리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조도군도는 마치 새가 모여앉아 있듯이 154개 섬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양새다. 목포와 제주, 인천으로 가는 해로의 갈림길에 있어 일찍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진도군청 제공
전남 진도군에 자리잡은 조도. 이 섬 이야기를 하려면 슬픔이 앞선다. 바로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 해역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뿌려댄 진도 팽목항에서 불과 8~9㎞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목포와의 거리는 100㎞ 정도. 조도면은 면 단위로는 섬이 가장 많은 곳이다. 유인도 35개, 무인도 119개 등 모두 154개나 되는 섬이 옹기종기 모여 조도군도를 이룬다. 면 단위 소재지인 하조도가 이 중 가장 크다. 섬 생활이나 외부와의 교통편도 모두 하조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상·하조도를 합쳐 통상 조도라 부르기도 한다.
조도와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영국 함대와 관련된 것도 있다. 때는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6년. 청나라 위해(威海)에 갔다가 제 나라로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이곳을 잠시 들른 적이 있다. 함대 중 리라호 선장은 지금의 상조도 도리산 전망대가 서 있는 곳에 올라 주변을 살폈다고 한다. 작은 섬들이 마치 새가 모여 있듯이 곳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감탄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보고서를 써서 이곳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극찬했다. 조도란 이름이 붙은 사연도 새가 모여 앉아 있는 모양새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가 남긴 <항해기>(1818년)엔 이런 구절이 있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조도에 사흘간 머물면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조도 말과 생활습관을 기록해뒀다. 자기네들 마음대로 섬의 이름도 붙였다. 하조도는 앰허스트섬, 상조도는 몬트럴섬, 외병도는 샴록섬, 내병도는 지스틀섬 등이다. 이처럼 조도는 일찍부터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탄 섬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70년쯤 지난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뒤엔 군사적 요충지로 조도를 중심으로 한 진도 일대를 정식으로 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만일 당시 조선 왕실이 영국에 진도 일대를 내주었다면, 지금의 홍콩이나 마카오와 같은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도 인근 어부들이 조기잡이를 하며 부르던 민요인 ‘닻배노래’를 재현하는 모습. 진도군청 제공
구멍 통과해야 오를 수 있는 구멍바위
조도의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하조도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170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진도군 의신면에서 인동 장씨 장동보란 사람이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훨씬 이전 시기의 흔적도 남아 있긴 하다. 읍구동네 고개에 지석묘 3기가 남아 있고, 유토동네 앞엔 선돌도 있다. 이 일대에서 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점에 미뤄볼 때, 적어도 하조도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육리 입구에는 고려 시대 고분도 있고, 조선 중기엔 남도 만호진 별장이 배치돼 신금산이 돈대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섬 곳곳에선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하조도 등대산 구릉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장죽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등대 앞바다 물살이 요동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광경을 보노라니 놀랍기 짝이 없다. 조류의 세기가 어찌나 센지, 진도대교 울돌목과 호형호제할 정도다. 하조도 등대는 목포와 제주도, 인천으로 향하는 삼거리이자 분기점으로, 등대 앞바다는 여객선과 화물선, 멸치잡이 어선들이 쉴새없이 오가며 북새통을 이룬다. 어족자원이 줄어들어 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목포와 진도에서 나온 꽃게잡이·멸치잡이 배들이 뿜어내는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 하조도 등대는 1909년 2월 일본이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세웠으나, 이제는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이 섬이 관광지로 거듭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면 소재지인 하조도엔 산이 두 개 있다. 최고봉은 동쪽에 있는 신금산(234m)이고, 서쪽 끝에는 돈대봉(231m)이 있다. 돈대란 높은 언덕에 옹벽을 쌓은 곳이나,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 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던 곳을 말한다.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다른 지역으로 위험을 전하는 구실도 했다. 한적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솟대바위처럼 거대한 형상의 손가락바위가 위용을 드러낸다. 손가락바위는 켜켜이 쌓인 퇴적암 덩어리로 돼 있다. 정면에서 보면 얼핏 엄지손가락 모양처럼 보이지만 세 개의 봉우리가 의좋은 삼형제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손가락바위의 다른 이름은 일명 구멍바위. 통나무 사다리를 타고 바위에 올라선 다음에 구멍을 통과해야 바위 정상에 이를 수 있다. 바위에 난 구멍을 통해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섬들은 잠시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게 했다. 손가락바위에서 내려와 돈대봉 정상을 향해 난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예쁜 들꽃들이 반갑게 맞이하며 자꾸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섬에 난 산길은 바람 때문에 풀도 키가 짤막해서 마치 잘 가꾼 정원의 잔디를 보는 듯하다. 그 위로 희고 노란 들꽃이 앞다퉈 피어 있으니 알프스의 여름 못지않은 절경이다. 돈대봉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와 투스타바위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읍구마을로 가는 방향을 따라 접어들면 숲길을 지나 돌무더기가 있는 작은 봉우리 넘어 마침내 신금산 정상에 다다른다.
주민들이 미역을 바닥에 널어놓고 말리고 있는 모습. 이재언 제공
모자반 대량 양식에 성공
해수욕장이 있는 신전마을엔 ‘신지식인’이란 이름에 걸맞은 해문수산 김향동 선생이 살고 있다. 그는 1948년생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 평생을 수산업에 몸담았다. 그의 부친인 고 김석두씨는 국내 최초로 미역 양식에 성공한 인물이다. 김향동 선생은 한때 미역을 양식해 일본으로 수출해왔으나 그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10년 이상을 모자반 연구에 몰두했다. 톳과 비슷한 모자반은 경상도와 제주도에서 많이 찾는 해조류인데, 초기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양식이 불가능했었다. 그런데 한 개인의 노력으로 결국 까다로운 모자반 대량 양식의 길이 열렸다. 참모자반은 성숙된 모조에서 어린(곤봉형) 배를 추출해 육상배양장에 옮겨 약 2개월 정도 성장시켜 양식한다. 참모자반은 칼슘, 당질, 회분, 비타민 등이 풍부한 웰빙식품이다. 현재 신전리에서 아들 김성환(37살)씨를 후계자로 삼고 모자반 양식의 대중화를 위해 전념하고 있는 김향동 선생은 신전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모자반과 톳의 부표를 가리키며 “푸른 바다에서 건져내는 해조류 덕으로 살고 있다”며 웃었다.
20년 전 길이 510m 조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조도의 일상도 꽤 바뀌었다. 조도대교는 면 소재지인 하조도와 상조도를 잇는 다리다. 차를 타거나 걸어서 상조도로 옮겨갈 수 있어 상조도까지 둘러보는 관광객이 늘었다. 다리가 시작되는 하조도 끝자락엔 공원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전부터 이곳은 상조도와 당도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누군가 ‘한국의 할롱베이’라 이름붙인 조도도 이제 아픔을 걷어내고 뭍사람들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하조도 신전해수욕장 풍경. 고운 모래가 깔려 있다. 이재언 제공
주민들이 조도 인근 바다에서 잡아올린 멸치를 어선에서 곧장 삶고 있다. 이재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