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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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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로당 보고서 (하)]

“방 따시고, 배 따시면 최고여. 다 늙어 뭘 더 바라겄어?”

지난달 초순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계마을 경로당의 저녁. 경로당 안방 바닥이 지글지글 끓었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들이 뜨끈한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반은 ‘ㄴ’자로 다리를 뻗고 앉고 반은 모로 누웠다. 한쪽에 놓인 텔레비전에선 일일연속극이 한창이다. “나는 연속극을 보믄 끝이 어찌 날지 다 알아부러.” 다음 드라마 내용 점괘까지 추임새로 넣어 가며 할머니들은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갈 듯하다. 그 틈에서 송아무개 할머니(82)의 고개가 ‘툭툭’ 떨어진다. 온종일 김장 재료 손질하고 돌아와 경로당 식구들과 함께 연속극을 보다 나른하게 조는 그 순간, 근심도 사라진다.

서계경로당의 다른 이름은 ’서계마을 한울타리 행복의 집’이다. 김제시는 2004년부터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을 새로 고쳐 노인이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그룹홈’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경로당의 기능을 사랑방과 급식장에서 공동살림집이나 마을복지센터로 넓히려는 시도다.

1999년 문을 연 서계경로당 역시 2007년 부엌 공간을 확장해 그룹홈으로 탈바꿈했다. 서계경로당이 다른 경로당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잠’이다. 다른 경로당은 점심이나 저녁 하루 한두 끼 밥을 함께 먹지만 저녁엔 각자 집으로 돌아가 따로 잔다. 이와 달리 서계 경로당 회원들은 밤에 모여 함께 자고 낮에 각자 집에 들러 청소를 하고 텃밭 농사도 짓는다.

서계경로당 회원들이 모두 그룹홈에서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서계경로당 등록 회원은 65명이지만 그룹홈 입소자는 여성 노인 11명이다. 경로당에서 먹고 자는 경우는 모두 독거노인이다. 가끔 자식들이 찾아오면 집에서 자지만 매일 밥 먹고 씻고 놀고 자는 할머니들의 ‘진짜 집’은 경로당이다.

서계경로당 할머니들의 저녁은 비교적 단조롭고 규칙적이다. 저녁 밥을 먹고 이불을 깔고 연속극을 보고 간식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마주 본 방 2개에 나누어 자리를 잡는데, 누구랄 것도 없이 바닥에 까는 요를 절반으로 접는다. 여러 명이 한방에서 모여 자면서 공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할머니들은 집을 두고도 경로당에서 잠을 자는 첫 번째 이유로 ‘외로움’을 꼽았다. 경로당 화장실 청소를 도맡은 김 할머니(82)가 저녁 간식인 홍시를 먹으며 말했다. “늙으면 사람이 귀하잖아. 외로운 게 제일 힘들어. 혼자는 외로운디 여기서 살믄 재밌어. 단체 생활하니께. 혼자 사는 노인 자다가 죽어도 모르는디….”

2013년 김제시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독거노인의 38.7%가 가장 큰 어려움으로 외로움과 고독감을 꼽았다. 혼자 사는 노인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죽는 것이 두렵다. 2013년 김제시가 펴낸 ‘김제시 공동생활가정 개선 및 발전방안 연구’를 보면, 그룹홈 이용 뒤 외로움과 고독감이 줄었다는 응답이 전체 이용 노인의 76.5%였다. 그룹홈에서 생활하면 옆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삶, 아직 함께 살아 있다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북 김제 서계마을 경로당은
잠까지 함께 자는 ‘그룹홈’
낮엔 함께 밥먹고 각자 텃밭농사
밤엔 도란도란 잠자니 고독감 뚝

“늙으면 사람이 귀하잖아
혼자는 이로운디 여기선 재밌어”
눈뜨면 옆사람 온기에 생동감 느껴

서울 답십리 ‘개방형 경로당’
한귀퉁이 어린이책 꾸미니
어린이들 시시때때 찾아와
책읽어주며 교감 “활력 넘쳐”

낮 한때만 나누는 사랑방을 넘어
밥만 같이 먹는 급식소를 넘어
공익·나눔형 공간으로 진화

서계경로당의 다음날 아침은 조용한 가운데 바빴다. 이불을 개는 할머니, 바닥을 닦는 할머니, 쌀을 씻는 할머니, 국을 올리는 할머니, 마당을 쓰는 할머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구나 솔선수범 한다. 대부분은 일반 경로당에서 그룹홈으로 바뀐 2007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솔선수범은 할머니들이 터득한 공동생활의 지혜다. 내복 바람으로 안방에서 걸레질하던 이아무개(89) 할머니가 말했다. “처음에는 여기도 갈등이 있었어. 밥하고 청소를 하는 사람만 계속하다 보니 불만이 쌓이는 거제. 그래도 오래 같이 살다 보니 이제는 누가 군소리 안 해도 스스로 일을 찾아 한당께. 가끔 티격태격은 해도 크게 싸우진 않어.”

이 곳과 달리 상당수 그룹홈에서는 가사 분담 등을 이유로 회원들 사이가 틀어지곤 한다. 나이 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활 방식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그룹홈의 과제다.

할머니들은 1주일 가운데 수·목·금 세 차례 점심은 근처 금구교회에 단체로 가서 무료급식을 먹고 온다. 다른 날은 하루 세끼를 모두 경로당에서 먹는다. 아침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의 끼니를 챙기게 된다. 경로당에 가면 항상 밥이 있으니 그룹홈에 살지 않는 다른 경로당 회원들도 아침·점심·저녁 아무 때고 찾아와 밥을 먹는다. ‘김제시 공동생활가정 개선 및 발전방안 연구’ 결과에서도 “그룹홈 이용 뒤 식사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는 응답이 전체 이용 노인의 80.8%였다. 함께 삼시 세끼를 챙기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

그룹홈에서는 개인이 냉·난방비를 내지 않는다. 서계경로당엔 김제시와 나라에서 1년에 경로당 운영비로 300만원, 그룹홈 지원금으로 300만원이 나오는데 대부분 냉난방비에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식재료비나 간식비는 쪼들리는 형편이다. 경로당 총무를 맡은 유아무개 할머니(76)가 말했다. “시에서 주는 거로는 조금 부족하제. 여기저기서 쌀도 주고, 회원들이 돈 걷어서 팔아먹기도 하고, 자식들이 이것저것 보내기도 하고 그럭저럭 살고 있어.”

밥을 먹은 뒤 할머니들은 각자의 바구니에서 약봉지를 몇 개씩 꺼내 든다. 고혈압, 무릎, 허리, 당뇨, 심장 등을 치료하려 먹는 약이 한번에 너댓알에 이른다. 그래도 서계경로당 그룹홈 할머니들은 서로가 서로의 힘을 솟게 하는 엔도르핀이다. 일주일에 두 번 보건소 직원과 함께 건강체조를 할 때도 낑낑대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기 바쁘다. 점심 식사 뒤 경로당 거실에 둘러앉아 마시는 커피는 할머니들의 또 다른 낙이다. 당뇨가 있는 이 할머니(87)는 매일 한 잔 마시던 커피마저도 끊어보겠다며 내내 침만 삼킨다. 때마침 커피 마시는 걸 놓고 즉석 논쟁이 벌어진다.

“요즘 커피 마시면 속이 아파. 안 좋아.”

“워매 커피 먹고 죽었다는 사람 못 봤구먼. 얼마나 산다고 그걸 참어. 커피는 뜨건 맛으로 먹제.”

“커피 너무 뜨거우면 내장 삶아져유.”

“개, 돼지여? 내장이 삶아지게?”

개, 돼지 소리에 할머니들은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는다.

농촌 김제의 그룹홈이 주로 어르신 공간이라면, 대도시 서울의 개방형 경로당은 지역의 여러 세대가 어울리는 공간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3동 경로당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20여명의 꼬마가 할아버지 방에 들어선 뒤다. 이 경로당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태양어린이집 아이들이다. 여러 번 와봤는지 아이들이 곧바로 책장으로 가 보고 싶은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그림 동화책 등 어린이책 300여권이 가득했다. 몇몇은 책장 옆에 가득 쌓여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동화책을 고른 아이들 옆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다가가 책을 읽어줬다. 어르신 옆에 붙어 앉은 아이들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경로당이 할아버지 방 한 켠에 ‘어린이 북카페’를 꾸민 건 지난해 7월이다. 동대문구의 개방형 경로당으로 선정돼 책장과 장서를 갖췄다. 장난감은 어르신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왔다. 인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찾아오면 어르신은 옆에 앉아 책을 읽어주는 게 전부지만 경로당의 변화는 컸다. 이병우(77) 할아버지는 “북카페를 꾸미기 전에는 아이들이 온다니까 싫어하는 회원도 있었다. 화투도 마음대로 못 치고 옷차림도 조심해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손주 같은 아이들 보는 재미에 다들 좋아한다. 활력이 넘친다”고 말했다.

어린이에게만 경로당을 개방하는 게 아니다. 매주 경로당에서 진행되는 장구·노래교실은 마을주민 모두에게 열려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노래교실은 수강생 35명 가운데 비회원이 10명이나 된다. 지난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해 자식뻘인 40~50대 주민들이 경로당을 자주 찾았다.

정진애(80) 경로당 회장은 “경로당을 개방하고 보니 누가 언제 올지 몰라 늘 깨끗이 해놓게 되고, 마을 주민과의 관계도 더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경로당도 진화한다. 끝

 

김제/최예린 기자, 원낙연 기자

 

[한겨레신문 2016년 12월 22일 기사]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75662.html?_fr=mb2#csidxbd49e0776a19b4d86d6b91d18850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