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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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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오손도손 모여 사니 매일이 재밌는 잔칫날이죠

 

노인 공동생활공간 ‘사구시 사랑방’


15가구 26명 사는 당진 농촌 마을
온 주민이 공동으로 노인 돌봄 실천

십시일반 돈 모아 사랑방 만들고
마을 노인들 함께 생활하게 해

주민들이 앞다퉈 먹을거리 가져와
사랑방 ‘특식’놓고 마을잔치 열어

산책·윷놀이 하며 노노(老老) 케어
고령 사회 대안 ‘사회적 가족’ 실현

당진 사구시 사랑방 노인들이 산책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당진 사구시 사랑방 노인들이 산책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노인들이 행복하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고령화 사회의 피할 수 없는 그늘, 바로 노인 부양 문제다.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30%가 넘는 129만여 명이 홀로 산다. 한 해 4% 넘게 느는 추세다. 노인 돌봄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돌봄’ ‘커뮤니티 케어’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충남 당진시 사기소1통1반 ‘사구시마을’은 마을공동체의 노인 돌봄이 실현되고 있는 곳이다. 돌봄의 중심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사구시 사랑방’이다. 홀몸노인 6명이 공동생활하는 보금자리를 넘어 온 마을 노인과 주민이 어울려 서로 의지하고 보살피는 공간이다. 어버이날을 나흘 앞둔 지난 4일 사구시 사랑방의 웃음 넘치는 소소한 일상을 함께했다.
 
마을 사람들이 ‘버스 길’이라고 부르는 지방도에서 마을 이정표를 보고 핸들을 꺾자 굽은 길이 시작됐다. 작은 저수지를 지나 4㎞쯤 들어갔을까. 산으로 빙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15가구 26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65세 이상 노인만 12명이다. ‘사구시 사랑방’은 마을 한가운데 나무로 지은 정자 옆에 자리잡고 있다.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기운이 훅 끼친다. 온실에 들어온 듯하다. 밖의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데도 난방 보일러를 틀어 놓아서란다. 방 안에 있던 예닐곱 되는 할머니들이 땀 흘리는 기자가 안쓰러웠는지 잠시 창문을 열어 준다. 사랑방 회장인 황정옥(82) 할머니는 “노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 냉기가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 쓴다”고 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활짝 웃고 있는 손영자·윤종학·이옥자·황정옥 할머니(왼쪽부터). [프리랜서 김성태]

점심을 함께 먹으며 활짝 웃고 있는 손영자·윤종학·이옥자·황정옥 할머니(왼쪽부터). [프리랜서 김성태]

때마침 점심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매일 끼니를 함께하다 보니 암묵적으로 정해진 ‘당번’이 있다. 박순복(85) 할머니가 밥을 짓고 황 할머니가 반찬을 만들면 이옥자(84) 할머니는 음식물 쓰레기, 손영자(76) 할머니는 설거지를 담당하는 식이다. 최연장자인 맏언니 윤종학(91) 할머니만 ‘열외’란다. 이날만큼은 박 할머니의 며느리 하기숙(58)씨와 황 할머니의 딸 김명숙(55)씨가 사랑방에 와서 부엌 일을 도왔다. ‘특식’을 준비하는 날이어서다. 상 차리는 걸 돕던 마을 반장 김낙준(61)씨는 “특식 있는 날엔 온 마을 사람을 사랑방으로 불러서 잔치하듯 함께 먹는다”고 말했다.
 
‘사랑방 특식 잔치’는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특별한 식재료가 있을 때마다 열린다. 이날 특식 메뉴는 가죽나물을 곁들인 제철 나물 비빔밥이다. 가죽나물은 참죽나무의 여린 잎이다. 마을 반장 김씨는 “마을에 키가 30m 넘는 참죽나무들이 있는데 사흘 전 카 크레인(이동식 크레인)을 하는 친구가 와서 잎을 따준 덕분에 오늘 마을 어른들에게 가죽나물을 대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머니들도 거들었다. “얼마 전엔 마을 사람들이 붕어랑 민물고기랑 잡아와 어죽털레기를 해 먹었고요. 마을 논에서 거둔 미나리를 보내왔길래 미나리전을 해서 먹었지요.”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온 날엔 온 동네 고기 잔치를 했어요.”
 
사랑방의 점심 시간인 ‘정오’가 다가오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더 모여들었다. 식탁 자리가 모자라 방바닥에도 상을 펴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최연장자 윤 할머니가 입을 뗐다. “나도 여기 한 자리 끼어 모여서 먹으니까 좋아.” “이 자리에 없으면 흉보니까 꼭 와야 해.” 웃음이 터졌다. 사랑방 회장 황 할머니는 “노인들에겐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는 것 같다”며 “맛난 것을 해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함께 먹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우리 노인들을 보살펴 주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랑방에 모여 윷놀이하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사랑방에 모여 윷놀이하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사랑방 한쪽 벽에 걸린 흰색 칠판은 ‘기부자’들의 이름으로 빼곡하다. 믹스커피와 과일, 반찬거리를 갖다 준 이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지난해 9월 사랑방을 만들 때 돈을 보탠 사람들이다. 마을 주민과 외지에 사는 자녀 60여 명이 형편대로 200만원에서 5만원씩 추렴해 3100만원을 모았다. 마을 반장 김씨에게 사연을 들어봤다.
 
“재작년 3월에 마실 장소인 윤 할머니 집에 불이 났어요. 반상회를 열고 별도의 마을 사랑방을 만들어 어른들을 모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마침 당진시가 공동생활하는 노인들을 지원하는 ‘독거노인 공동생활제’라는 사업을 하길래 신청을 했지요. 그런데 사랑방 후보지로 신청한 마을 빈집이 무허가라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을 주민 힘으로 직접 사랑방을 만들자며 정성을 모은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진2동과 당진시를 오가는 1년여 노력 끝에 ‘독거노인 공동생활제’ 지정을 받기는 했다. 다만 건물 리모델링 비용은 주민이 모은 자체 돈으로 충당하고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TV, 전자레인지 등 비품을 사는 비용 800만원만 지원을 받았다. 당진시 노인복지팀 윤정원 주무관은 “관내 9개 독거노인 공동생활제 가운데 사구시 사랑방이 여섯 번째인데 마을 주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만들고 운영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라며 “운영비와 시설 보수비 등으로 연간 510만원을 사랑방에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노인들은 매일같이 사랑방에 나와 종일 어울려 지낸다. 홀몸노인들은 사랑방에서 함께 자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방은 완벽한 ‘노인 돌봄’의 장소다. 마을 반장 김씨는 “그 전엔 외지에 나가 사는 마을의 자녀들이 혼자 사는 어른이 전화를 안 받는다며 나를 찾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사랑방에서 ‘자동 확인’이 된다”며 웃었다.
 
사랑방에선 ‘노노(老老) 케어’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막내급’인 70대 손영자 할머니는 15살 연상인 윤 할머니를 친언니처럼 살뜰히 보살핀다. 고령 탓에 듣는 게 약간 불편한 윤 할머니의 ‘대변인’을 자처한다. 손 할머니는 “따로 지낼 때는 방앗간 심부름이나 택시를 불러 시내 모시고 나갈 일이 생겨도 연락하시는 게 불편하곤 했는데 지금은 딱 붙어 지내니 보살펴 드리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가 돌았다. 90세가 넘었는데도 윤 할머니는 하루에 커피를 3~4잔이나 마신다고 한다. “마셔도 잠이 안 오고 안 마셔도 어차피 잠이 안 오니 그냥 마시는 거야”라는 할머니 말에 한바탕 웃음이 번진다. 그 사이 방 밖에는 오전에 불던 바람이 잦아들고 볕이 좋아졌다.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집 울타리에 철쭉꽃이 한창인 ‘반장댁’을 돌아오는 코스다.
 
윤 할머니와 이정순(86) 할머니가 유모차에 의지해 앞장을 섰다. 미나리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논을 지나 참죽나무 몇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길로 들어섰다. 야트막한 비탈길이다. 반장댁이 가까워오자 오르막이 심해졌다. 급기야 유모차를 밀고 가던 윤 할머니가 ‘만세’를 불렀다. “에고, 더는 못 가, 못 가. 점심 먹은 게 다 내려갔어. 죽는 게 나아.” 모두들 박장대소다. 
 


늘어나는 고령자 가구

늘어나는 고령자 가구

노인들이 넘어질세라 뒤를 따르던 황 할머니의 아들 김명호(57)씨가 잽싸게 윤 할머니의 유모차를 잡고 그 위에 윤 할머니를 앉혔다. 유모차가 움직이자 윤 할머니가 해맑게 웃는다. 다른 할머니들도 “호강하네요”라며 웃는다. 반장댁 철쭉 울타리에 도착했다. “분홍빛 옷 차려입은 할머니들이 더 화사해서 철쭉꽃이 빛이 나질 않네요.” 객쩍은 농에 할머니들 얼굴엔 또 웃음꽃이 피었다.
 
산책을 마치고 사랑방에 돌아오자 황 할머니가 “수고들 했다”며 사이다 한 잔씩을 건넸다. 숨을 고르고 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바닥에 담요를 깔고 윷판을 놓고는 빙 둘러 앉았다.
 
“사랑방 놀이의 9할은 윷놀이이고요. 민화투가 1할입니다.” 산책이 힘들었다던 윤 할머니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윷판 바로 옆에 ‘좌정’을 하곤 ‘1번’으로 윷을 던졌다. 본새를 보니 이곳의 ‘지엄한 규칙’인 듯했다. 사랑방 총무
김연학(79) 할아버지는 “윤 할머니가 윷판의 말 놓는 걸 늘 주관하신다”며 “머리 시원찮은 사람은 윷판을 잘 못 쓰는데 할머니는 정말 말을 잘 놓는다”며 자랑을 했다. 오후 내내 윷이 던져질 때마다 사랑방에선 박수 소리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오순도순 모여 지내니 매일이 재밌고 행복한 잔칫날 같아요.” 황 할머니 말에 너나없이 맞장구를 쳤다.
 
겨울철이나 농사일이 바쁘지 않을 때는 사랑방이 함께 잠을 자는 ‘집’이다. 늘 보는 얼굴들인데 잠자리에서 무슨 얘기들을 나눌까. 손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란히 주욱 누워서 주로 자식들 얘기를 하지요. 다들 3~5명씩 자식들을 뒀는데 모두 외지에 나가 있으니 늘 잘 사는지 염려를 하지요.” 더러는 며느리 흉도 보느냐는 우문에 “며느리 자랑을 하면 했지 그런 일은 없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을에서 한나절 지내는 동안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들려준 말 때문이다. “우리 마을 자식들은 다 효자고 효녀”라는 거다. 점심을 먹을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빼놓지 않는 화제다. 그것도 제 자식이 아니라 남의 집 자식을 칭찬하고 자랑한다. “저 할머니 아들은 다른 지역 읍장인데요. 어머니 안부가 궁금하면 새벽에라도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출근하는 효자예요.” 황 할머니가 묻지도 않았는데 귀띔하듯 한 말이다.
 
온 마을이 노인들을 돌보는 걸 보니 그럴 만하지 싶었다. “이 마을은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오는 동막골 같은 곳이죠. 30년 전 홀로 되신 어머니가 이곳에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지내며 행복해 하세요. 마을 어른들을 뵈면 정말 편하고 다 이모 같고 가족 같아요.” 인천 소래포구에 사는 황 할머니의 50대 딸 김명숙씨는 그래서 남편과 함께 이 마을로 돌아오기로 했다. 연말쯤 이곳에 집 짓는 일이 마무리된다. 김씨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머니와 노인들을 보살피며 살 것”이라고 했다. 
 
고령화 사회 노인 부양 문제의 대안 중 하나인 ‘사회적 가족’, 당진 사구시마을에선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김남중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2018년 5월 16일] [논설위원이 간다] 오손도손 모여 사니 매일이 재밌는 잔칫날이죠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공동체의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사적 소유의 방종은 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가져온다는 유럽의 경험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바로 그렇게 망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솔론,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가 호소했던 개혁은 바로 그런 위험의 경고였다.

1949년 5월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 뉴욕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잡지 <먼슬리 리뷰>가 창간되었다. 그런데 창간호의 권두논문이 눈길을 끌었다. 그 논문의 필자가 뜻밖에도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고, 그것은 이 잡지의 사회과학 색채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은 사적 이해에 과도하게 경도된 미국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면서 공동체 이해의 회복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쥔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경고였다. 그의 경고는 당연한 듯 무시되었고 오히려 뒤이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그는 이 글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스로 피난처로 선택한 미국 사회에 대해서 그가 이런 딴청을 피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독일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자란 그가 보기에 사적 이해의 과잉으로 공동체 가치가 밀려난 미국 사회가 매우 위태롭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의 경제제도는 원래 공동 소유에서 시작되었다. 집단을 이루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에서 잠시 사적 소유가 허용되었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사적 소유를 보호해주는 조건에서만 그러했다. 그래서 공동체의 보호막(팍스 로마나)이 사라지자 곧바로 사적 소유는 폐기되고 공동체 소유만 지속되었다. 바로 봉건제도이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이어받아 등장하였고 그것의 사적 소유도 당연히 공동체의 보호막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럽의 자본주의이다.

그런데 미국 자본주의는 봉건제는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해와도 단절된 채 일방적인 식민의 형태로 건설되었고, 따라서 공동체의 보호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채 사적 이해만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미국의 예외주의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방종으로까지 발전하였는데 약탈적 자본가로 이름을 떨친 제이 굴드가 그것을 대변한다. 그는 1886년 자신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 노동자 절반을 고용하여 나머지 절반을 죽여버릴 수 있다.”

미국이 신대륙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그리고 백인들 이전에 그 땅에 살고 있던 약 1300만명의 원주민들이 학살로 겨우 20만명만 살아남을 동안 사적 이해의 이런 방종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4번의 공격으로 10야드의 땅만 빼앗으면 무한히 전진을 계속하는 미식축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메리카대륙의 고립에서 벗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후 세계의 “제국”을 자처하면서 이런 방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공동체의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사적 소유의 방종은 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가져온다는 유럽의 경험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바로 그렇게 망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솔론,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가 호소했던 개혁은 바로 그런 위험의 경고였다. 아인슈타인의 경고는 실제로 빈말이 되지 않았다. 철옹성 같았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은 1970년대 베트남에서 참담하게 무너졌고 경제적 번영도 함께 막을 내렸다. 지금 미국은 자신을 건사하기에도 바빠 세계를 상대로 무역 분쟁을 일으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 경고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울리고 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한진, 삼성, 엘지 등 자본가들의 반사회적 행태가 그것이다. 제이 굴드의 방종을 그대로 본뜬 이들의 행태와 거리낌 없는 범법 행위는 우리의 공동체 이해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려준다. 그 방종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그 해법도 개인적 처벌이나 경영 퇴진을 넘어 사적 소유의 사회적 규제에 있다는 것은 이미 150년 전에 알려졌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공동결정 제도를 통해 생산수단의 사용을 사회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미투, 교육, 일자리 문제의 해법도 모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들 유럽 나라는 알려주고 있다.

그 해법의 방향을 가리킨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고 있다. 공동체의 회복을 밝힌 촛불이 마르크스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를 우리 사회의 자본가들이 때맞추어 애써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역사의 간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4386.html#csidx4905a22b5438060812ce3838b42cc46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한겨레 2018년 5월 14일]

느린삶학교 모임

2018. 4. 30. 09:51 | Posted by 행복 기술자

한겨레신문에서 만든 느린삶학교 과정 5기가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1기로 마쳤는데, 5기까지 나왔다니 반가웠습니다.

1기부터 5기까지 모임이 있다고 하여 모처럼 모임에 나갔습니다.

 

 

강화 지역 공동체 운동가 이광구씨

이광구씨는 서울법대 82학번이지만 졸업장은 없다. 대학 동기 모임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서울법대 전체 동기 모임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서울법대 82학번 운동권 동기 모임에는 나갑니다. 최소 2학년까지 학생운동을 한 친구들이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 모두 25명 정도 됩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광구씨는 서울법대 82학번이지만 졸업장은 없다. 대학 동기 모임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서울법대 전체 동기 모임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서울법대 82학번 운동권 동기 모임에는 나갑니다. 최소 2학년까지 학생운동을 한 친구들이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 모두 25명 정도 됩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동안 돈벌이로 23가지 일을 했더군요.” 그가 했던 일은 이렇다. 용접공, 노동상담, 자동차 정비공장, 대리운전, 해외인터넷방송 기획사, 두부공장, 대안학교, 영농조합, 증권사 등등. 상장 증권사를 갖고 있는 지주사 대표이사도 했단다. 잦은 생업 변경을 두고 아이들한테 “아빠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원망을 듣기도 했단다. 그는 최근 <돈이 결코 마르지 않는 인생 2라운드 50년>이란 책을 펴낸 이광구(55)씨다. 23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저자를 만났다.

직업만 다양한 게 아니다. 학생운동 이후 꾸준히 실천해온 사회운동의 형태도 무척 다양하다. 지금은 청년공동주거운동과 지역공동체운동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서울대 법대 82학번이다. 졸업은 못했다. 학생운동을 하느라 학점 미달로 제적을 당했다. 85년과 87년 두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각각 1년씩 옥에 갇혔다. “처음엔 구로 지역에서 가두시위 주동을 하다 구속됐죠. 87년엔 구로구청에서 대선 개표부정 항의 농성을 하다 잡혔는데 전과가 있다고 구속시키더군요.”

석방 뒤에도 구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92년 대선 이후로는 지역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 지역 활동가들과 생협 운동을 했다. 95년엔 노동자협동기업인 자동차 정비공장을 열었다.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일이었다. “빨리 성취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6개월 만에 문을 닫았어요. 빚을 꽤 떠안았죠.” 빚을 갚기 위해 대우자동차에 들어갔다. 또 부천 전셋집을 빼서 강화도 월셋집으로 옮겼다.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의 ‘운동권 인재 특채’ 정책 덕에 들어간 대우자동차에선 딱 3년6개월간 일했다. “회사에서 (노조를 관리하는) 노무부서로 발령 내려고 하더군요. 받아들일 수 없었죠.”

서울법대 운동권 제적·두차례 구속
노동운동 거쳐 생협 등 지역운동 나서
재무설계사 6년 경험 ‘돈의 가치 자각’

공동주거·로컬푸드…건강한 돈벌이
‘돈이 마르지 않는 인생 2라운드 50년’
“지역공동체 통한 건전한 관계가 답”

2004년에 또 다른 인생의 분수령을 만났다. 같이 노동운동을 했던 라의형씨가 세운 포도재무설계에 입사한 것이다. 이곳에서 한차례 퇴사와 재입사를 거쳐 2013년까지 6년을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재무설계사 일을 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죠. 돈 문제에 대한 개인의 자각 없이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3년 전부터는 협동조합 ‘큰바위얼굴’을 설립해 청년공동주거운동을 하고 있다. “대학 선후배 10명이 뜻을 모았어요. 월 100만원을 받는 상근 직원도 둘 있습니다.” 저리의 공공 정책자금을 지원받아 아파트 등을 전세로 얻어 대학생들에게 싸게 임대해준다. 지난해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모한 안산과 부천 지역 주택 33채도 확보해 모두 90명의 청년에게 집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그가 20년 동안 살아온 강화 지역 공동체 운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부터 강화 주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파는 로컬푸드협동조합 일을 시작했고 장애인 직업재활 시설인 쌀도정공장에서 영업도 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를 건강하게 꾸리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 자녀(나리·온달·보리)를 두고 있다. 2010년엔 사교육 대신 강화의 자연 속에서 아이들의 꿈을 보듬어주며 키워낸 이야기를 담은 책 <희망교육 분투기>를 펴냈다. 큰딸 나리는 고교를 나온 뒤 생태운동을 하다 뒤늦게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고 아들 온달은 인천 과학고를 나와 지금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보리는 대안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대신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은퇴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그가 인생 2라운드를 맞는 이들에게 강조한 열쇳말은 ‘낙관과 목표’이다. 지나치게 노후를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목표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도의 경제력이면 나라가 어느 정도 노후를 보장해줄 수 있어요. 금융사 공포 마케팅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그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비용 사회’라는 점이다. “변호사와 공무원 부부조차도 사교육과 주거비 때문에 헉헉거리더군요. 재무상담을 할 때 그런 사례를 많이 봤어요. 충격이었어요.” 말을 이었다. “재무설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무 상태를 아는 것, 꼭 하고 싶은 재무 목표를 정하는 것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늘 목표 설정이 문제입니다. 사회 시류에 편승하거든요.” 자기 목표를 정하고 소비를 줄인다면 노후 불안은 기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전제는 국가가 시민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고 소득 양극화 해소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쉬워도 실천에 나설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 자녀의 사교육에 돈을 쓰지 않았다. 아이들은 고교 졸업 이후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지금 사는 강화도 북쪽 끝단의 집도 4천만원에 구입했다. 경조사도 아주 가까운 경우만 챙긴다.

“불안의 핵심은 돈이 아니라 관계인 것 같아요. 지역사회에서 눈빛 마주치고 서로 어울리면, 혹 무시당할까봐 눈치 보면서 고비용으로 달려가는 풍조가 완화되지 않을까요.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으면 소비도 줄고 잔잔한 즐거움을 느끼죠.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자극적 즐거움을 찾아 고비용으로 달려가죠.”

강성만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9254.html#csidx46b0511714999209b132a08c7af6ff9

 

[한겨레 2018년 1월 25일]

겨울 텃밭 풍경

2017. 12. 11.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겨울이 다가오면서 텃밭도 마감 상태입니다.

그래도 오랫만에 텃밭에 들러 시금치를 수확했습니다.

너무 늦게 심어서 그런지 시금치가 별로 많이 자라지 않았지만, 마무리 수확을 했습니다.

 

 

‘싸고 좋은 집’에 사는 데 ‘자격’이 필요한가요

[더 나은 사회] 덴마크 사회주택 찾아가보니…

입주자격 없이 ‘누구나' 사는 공간으로
입주기간 없이 원하는 만큼 ‘내 집'으로
‘입주자 민주주의법’ 도입해 정주의식 높여

임대료는 일반주택의 70% 수준
구입해도 임대료 내 ‘사회적 책임’ 다해

보편복지의 ‘자유·평등·정의' 실현 수단으로 자리매김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의 모습.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의 모습.

최근 국내에서 사회적 약자의 주거복지 모델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사회주택은 서구에서 보편적 주거복지 모델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주거복지가 발달한 북유럽 국가 가운데서도 양과 질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덴마크 사회주택 역사는 150년이 넘는다. 1853년 덴마크 노동자들 사이에 콜레라가 창궐해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자, 의사였던 클라우스 에밀 호르네만(1810~1890)이 주거 여건 개선 운동을 벌인 게 덴마크 사회주택의 첫걸음이었다. 쾌적한 주거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 위에 ‘누구나 사는 집’으로 인정받는 덴마크의 사회주택을 둘러봤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리자 짙은 녹음에 둘러싸인 4~5층 높이의 아파트 수십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혼 청년들을 위한 10평 남짓 복층 아파트부터 일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방 4개짜리 99㎡(30평) 아파트까지 수백채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주택이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를 메우고 있다. 이곳의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는 ‘전국건설기금’ 이사장 크리스티안 호이스브로는 “덴마크에는 모든 주거 형태의 사회주택이 있다”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필요한 모든 주거 형태를 제공하는 것이 덴마크 사회주택 정책의 핵심 목표”라고 말한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전체 가구 대비 사회주택 가구 비중 조사에서 덴마크는 22.2%를 기록했다. 네덜란드(34.1%), 오스트리아(26.2%)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사회주택 정책을 구체화할 기금은 정부기금, 지역기금 등으로 혼재돼 있지만, 기금 운영은 비영리 민간기관인 베엘(BL·Boligselskabernes Landsforening, 주택조합협회)이 도맡고 있다. 베엘은 덴마크 전 지역의 모든 사회주택을 운영·관리하는 기관이다. 베엘에 소속된 주택협회만 해도 550여개에 이른다.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의 모습.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의 모습.
덴마크에선 사회주택을 일컫는 용어로 ‘소셜 하우징’(Social housing, 사회주택)보다 ‘코먼 하우징’(Common housing, 보통주택)을 흔하게 사용한다. 사회주택이 사회 소외계층을 포함한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덴마크 시민이라면 누구나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반 주거라는 인식과 의미가 깔려 있는 용어다. 베엘의 대외홍보 담당인 나탈리아 로가체프스카 매니저는 “덴마크 사회주택 정책은 누구나 싼 가격에 양질의 주거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덴마크 보편적 복지 정신과 맞닿아 있다. 덴마크에서 사회주택은 통제와 폐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덴마크 복지 모델의 핵심가치인 자유, 평등, 정의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덴마크 사회주택이 이렇게 보편적 주거 형태로 빠르게 확산된 이유는, 다른 나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세가지를 과감하게 제거했기 때문이다. 우선 덴마크에선 사회주택의 입주 자격을 없애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가족 단위 입주로 제한되는 일부 큰 규모의 사회주택을 제외하면 규모나 유형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입주할 수 있다. 입주 자격에 소득 기준이 없는 곳은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서도 덴마크가 유일하다.

둘째, 정해진 입주 기간을 없애 주거 안정성을 높였다. 입주자가 원한다면 한번 들어간 사회주택에서 평생 살 수 있다. 이것은 사적 임대주택과 공공 임대주택을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심지어 숨진 뒤에도 함께 산 자식들에게 우선거주권이 부여될 정도다.

셋째, 비용 부담을 없애 가처분 소득을 높였고, 이는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끼쳤다. 덴마크 사회주택은 입주자가 베엘에서 장기주택담보대출(모기지론)을 받아 매매계약을 한 뒤 입주한다. 그런데 원금 상환 여부는 전적으로 입주자가 결정한다. 만일 입주자가 사회주택의 소유를 원하지 않을 경우엔 이자와 관리비 등으로 이뤄진 임대료만 내면 되고, 소유를 원한다면 여기에 원금을 더 상환한다. 호이스브로 이사장은 “임대료는 주택 유형과 지역 여건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코펜하겐시 외곽 지역을 기준으로 대략 2명이 살 수 있는 복층 구조 33㎡(10평) 아파트의 임대료는 매달 3000크로네(약 54만원), 4인 기준 99㎡(30평) 아파트의 임대료는 9000크로네(약 162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인근 지역 일반 주거지의 임대료와 견줬을 때 대략 30% 정도 저렴하다고 덧붙였다.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 외벽에 그려진 벽화.
덴마크 코펜하겐시 외곽 사회주택 외벽에 그려진 벽화.
덴마크 사회주택 정책이 강조하는 ‘입주자 민주주의’도 덴마크 사회주택의 신뢰를 높이고, 임대주택도 내 집처럼 여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덴마크는 1984년 ‘입주자 민주주의법’을 제정했다. 사회주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입주자협의회의 논의를 거쳐 결정하게 하는 것이 핵심으로, 입주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 지속가능한 사회주택으로 운영하겠다는 취지다. 이를 통해 정부를 비롯한 공급자 중심의 사회주택 정책이 야기하는 사회·지리적 고립(게토화)을 막고, 정부의 지원 축소로 인한 주택의 질과 주거 여건 악화도 방지할 수 있다.

덴마크 정부는 사회주택 정책에서 강조하는 개인의 자유가, 보편적 복지 모델의 또 다른 핵심 가치인 평등과 정의를 훼손하지 않도록 다양한 장치도 마련하고 있다. 예컨대 덴마크 지방정부는 사회·경제 여건을 고려해 지역 사회주택의 25%에서 최대 100%까지를 집이 없는 노숙인(개인과 가정 모두 포함), 저소득층, 청년 등 취약계층에게 우선배분할 수 있다. 지방정부는 이런 계획이 정책적 성과, 즉 실효성을 갖도록 총선이 열리는 4년 단위로 세부계획을 마련한다.

그 밖에도 사회주택을 소유하는 입주자는 대출금 상환이 끝나더라도 관리비 등 일정 수준의 임대료를 계속해서 내야 한다. 입주민에게 부여한 권리만큼 사회적 책임도 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임대료의 3분의 2는 전국건설기금에, 나머지 3분의 1은 주택협회가 가입된 지역기금에 할당된다. 이 돈은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수리·보수 말고도 사회주택 관련 기관 가운데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곳이나 신규 사회주택 건설에 쓰여 사회주택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요컨대 덴마크 사회주택은 덴마크 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복지 모델의 비전과 가치를 달성하는, 대체불가능한 제도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 원리를 사회주택 운영의 기초로 삼는 한편, 평등과 정의를 지켜갈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소통을 강조해 정책적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사회주택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정책’이 아니라, 정부와 시민, 사회적 경제 주체 등 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유하는 국가 차원의 복지 비전과 핵심 가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코펜하겐/글·사진 서재교 미래세대정책연구소장,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한겨레 2017년 11월 9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18074.html?_fr=mt3#csidx7d54b526b6a9977b845f19e02c4deb0

텃밭 가꾸기

2017. 11. 13.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이제 수확을 하고 올해 농사도 마감할 때가 됐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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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꾸기

2017. 10. 23.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가을도 이제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텃밭도 결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를 솎고, 상추도 수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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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꾸기

2017. 10. 16.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이제 날씨가 서늘해졌습니다.

텃밭에 심은 무, 상추, 시금치, 쑥갓이 제법 자랐네요.

엊그제 비가 와서 더 쑥쑥 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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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풍경

2017. 10. 9.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무는 무성하게 잘 자라서 솎아줬는데, 상추와 시금치, 쑥갓은 아직도 새싹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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