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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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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숱이 많은 반면에 유난히 새치가 많긴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급속히 새치가 많아져서 4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새치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검은 머리가 많다고 우기고 있지만,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나에게 얼굴은 그대로인데 머리만 하얘졌다고 한 마디씩 하면서 염색을 하라고 권하곤 한다. 물론 대부분은 직접적으로 ‘염색 좀 하지’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텐데~~~’라고 은근히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나는 머리 염색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추호도 없다는 얘기는 혹시 해볼까 하는 생각 자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아마 앞으로도 머리 염색을 하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첫째는 신체적인 이유에서다. 나는 유난히 두피가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샴푸도 무자극성 내지 저자극성을 사용하고 있다. 자극성이 있는 샴푸를 쓰면 두피가 간지러워서 계속 긁게 되고, 비듬이 많이 떨어진다.

이렇게 두피가 민감하게 된 이유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살 때 소독이 안 된 동네 아저씨 이발 기구(바리깡?)로 머리를 깎는 바람에 두피 피부병(득?)이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다 나았지만, 그 피부병 때문에 사춘기 때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내 성격이 더 내성적으로 변하게 되었었다. 아무튼 내 민감한 두피 때문에 염색을 하게 되면 아마 몇 번 하지 못하고 그만 두게 될 것이 뻔할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린 상태다.

이런 내 변명을 듣는 몇몇 사람들은 요즘 염색약이 좋아져서 자극성이 덜 하다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학공학을 전공한 내 소견으로는 아무리 염색약이 천연 원료를 사용해서 저자극성이라고 해도 내 민감한 두피에 자극을 줄 정도는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자극성 있는 염색약을 사용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나빠지고 있는 내 눈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도 좋은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나는 극도의 근시인데다 나이가 들면서는 원시까지 겹쳐서 다초점 렌즈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조금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안경알의 무게가 무거워서(최대한 압축을 해도) 안경테를 폼 나는 얇은 테로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만약 염색약을 잘못 사용하여 눈이 더 나빠지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고 강의를 하는 게 취미이자 앞으로 생계수단인 마당에 눈이 머리색보다 훨씬 중요한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남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흰 머리야말로 나의 노숙함을 보여주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두 번째로는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는 나이 든다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지만 거부하지도 않는다. 나는 젊게 보이기 위해 머리 염색을 할 정도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체념하거나 포기한 상태는 결코 아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로 생각도 젊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젊음이 간다고 한탄하면서 어떻게 하면 노화를 멀리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할 정도로 젊음에 대해 절대적인 애착을 갖고 있지도 않다. 한 마디로 내 나이보다 젊게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은 하되,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 현상은 받아들인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흰 머리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더 나아가 나의 흰 머리가 나의 지식과 연륜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되, 젊은이들이 갖지 못하는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나타내주는 흰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은 것이 나의 머리 염색 거부 이유다.

나는 나의 흰 머리를 사랑한다. 나는 앞으로도 나의 흰 머리에 중후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흰 머리가 아니라 나의 내면인 것이다.

링컨이 말했듯이 40세 이후에는 내 얼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내면이 행복으로 가득 차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나의 흰 머리도 빛나는 월계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넘치고 흰 머리에는 행복한 세월이 모여 반짝거린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이지 않겠는가.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출처 : 메가경제 (http://www.megaeconomy.co.kr)

연말을 맞이해서 송년회 때문에 바쁘기도 하지만, 나이든 분들은 건강 검진 때문에 바쁘기도 할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때문에 병원 가기가 꺼려져서 건강 검진을 받지 않았었는데, 연말이 되니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처지가 되니 마음이 더욱 더 바빠진다. 

 

40세가 넘으면 국가 차원에서 2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하도록 건강보험공단에서 연락이 오니 개인도 병원의 건강검진센터도 연말에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나도 이 기준에 해당되어 몇 차례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귀찮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건강보험공단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검사는 대부분 혈액 검사를 비롯한 일상적인 검사들이기 때문이다. 
 


▲ [사진=픽사베이 mohamed Hassan 제공]
 

내시경 등 조금 비싼 항목들은 자기 비용 부담을 해야 하는 선택사항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일상적인 검사를 통해 치명적인 질병이 조기 발견되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겠지만, 고혈압, 당뇨 등의 생활습관병이 아니라면 이런 검사를 통해 발견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된다. 나는 다행히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큰 이상이 없어서 위염이나 헬리코박터균 치료 외에는 추가 검진이나 치료를 권유받는 경우가 없었지만, 대부분 추가 검진을 권유받는 것 같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건강검진 자체 시장이 최소 8조 내지 19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건강검진 후 추가 검진에 소요되는 비용도 4조 내지 14조 원에 이른다고 하니 이제 건강검진이 그 자체로 큰 산업 분야가 되었다. 건강 검진을 받아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추가 검진을 받도록 권유를 받았고, 이처럼 추가 검진 권유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제 건강검진 사업은 장례식장 사업과 더불어 병원, 특히 대형병원의 가장 알짜 수익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건강검진 사업이 병원의 주요 수입원이 되다보니 건강검진 자체가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 병원의 수입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좀 지나친 걱정일지 모르겠지만, 건강검진 결과를 설명하는 의사들도 환자의 건강보다는 병원 수입을 위해 과다한 추가 검사나 치료를 권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암이 최대 사망원인으로 떠오르면서 암에 대한 공포를 이용한 추가 검진 권유가 일상화되고 있다. 하지만 고가 장비를 이용해도 암의 조기 검진이 힘들뿐더러 추가 조직 검사를 통해 암으로 판정되는 확률이 아주 낮은 편이다. 예를 들어 유방암의 경우에는 의심환자가 실제 조직검사를 통해 암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0.6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름진 음식을 먹는 서구식 식습관으로 바뀐 후에 특히 중년 이후 대장 내시경검사를 하다가 용종이 발견되어 제거했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보면 대장내시경 검사를 하다가 대장에 구멍이 날 확률이 1만 명당 3.8명에 이르고, 용종을 제거하다가 구멍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다그겠느냐’는 속담처럼 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런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이 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서 몇 백만 원짜리 건강검진을 받도록 해서 몸에 무리를 가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검진은 진단용 약물 투여, 방사선 피폭 등 오히려 건강에 해로운 행위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엠알아이(MRI)나 씨티(CT) 등 고가 장비일수록 방사선 피폭량이 늘어나는 등 건강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더 나아가 설사 건강검진을 통해 암을 조기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를 통해 암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에 불과하다. 아직까지는 암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도 없고, 더구나 암 부위는 제거할 수 있어도 암이 전이하는 것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의사들은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를 통해 암을 제거했는데 암이 완치되었다면, 이는 원래 그 암은 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악성 암의 경우에는 수술을 하면 오히려 암이 급속도로 퍼져서 악화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결국 암은 우리 몸에서 수시로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조기발견보다는 면역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연말을 맞이해서 본인이 건강 검진을 받거나 부모님의 건강검진을 생각하고 있다면 한 번쯤 건강검진의 효용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건강검진을 무조건 거부할 일도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맹신도 피해야 한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무절제한 음주나 흡연을 삼가고, 운동을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출처 : 메가경제 (http://www.megaeconomy.co.kr)

요즘 들어 부쩍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 당연하게 죽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는 생각도 영향을 주지만, 아버지를 비롯해서 주위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되어서 더욱 더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듯하다.

아버지 형제 여섯 분 중에서 아버지를 포함해서 그 중 세 분이 돌아가셔서 이제 내 차례가 점점 더 다가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달 전 동생이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죽음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절감하고 있다. ‘태어나는 건 차례가 있지만, 죽는 것은 차례가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윗세대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 [사진=픽사베이 pasja1000 제공]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크게 보면 회피형과 적극적 대응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요즘은 죽음에 대한 회피형이 의외로 많은데, 그 가장 큰 이유가 현대 의학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현대 의학이 인류의 질병 퇴치와 건강에 기여하고 있는 바가 크지만, 노화로 인한 죽음을 물리칠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이 임박한 노인들을 병원 응급실로 옮겨서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미리 밝혀놓으면,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어르신들의 죽음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대부분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대부분의 노인 분들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움직이시다가 자연스럽게 돌아가셨다. 바로 이처럼 죽기 직전까지도 일상생활을 하다가 맞게 되는 자연스러운 죽음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죽음일 것이다.

 

내 집안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라 여자들은 90세를 넘어 거의 100세까지 사셨고, 남자들도 80세를 다 넘기셨다. 올해 1월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한국 나이로 치면 93세에 돌아가셨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 최초로 집이 아니라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셈이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어렵게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혼자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께서는 몸이 아프셔서 혼자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집에서 생활하도록 했을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신다고 농사도 못 짓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림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장수하는 이유도 나이가 들어서도 여자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덕분?)이라고 생각된다. 내 왕(고조)할머니께서도 98세까지 사셨는데, 그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텃밭에 배추와 무 등 채소를 심고 가꾸셨다. 또 장날에는 그렇게 가꾼 채소들을 단 하나라도 들고 지팡이를 짚고 가셔서 팔곤 하셨다. 가끔 학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왕할머니께서 배추 하나를 앞에 놓고 앉아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곤 했었다.

그 배추를 누군가 사가고 나면 왕할머니께서는 다시 집 텃밭으로 와서 배추를 하나 더 뽑아서 들고 다시 장에 가시곤 했었다. 왕할머니께서 배추를 팔아 얼마나 살림에 보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돈보다는 그냥 장 분위기를 즐기는 게 더 큰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런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기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장수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평화롭고 자연스런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제안해 본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12월 7일 게재 칼럼]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곤 한다. 오죽 했으면 건물 빌딩의 4층을 나타내는 ‘사’자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F’로 표시하거나 아예 3층 다음에 5층을 표시하겠는가. 그렇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멀리한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따지기 좋아하는 엔지니어로서 가끔 삶과 죽음의 경계, 즉 생물학적 죽음의 경계가 어디쯤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사실 의학자, 생명과학자들도 죽음의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뇌사, 심폐사, 세포사의 3단계로 구분한다.
 

▲ [사진=픽사베이]


의학적으로 완전한 죽음을 어느 시점으로 봐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완전한 죽음은 세포사로 봐야하지만, 현실적인 면에서는 심폐사를 죽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사가 “홍길동 환자 5월 29일 11시 45분에 운명하셨습니다”라고 의학적인 죽음을 선언하는 것도 심폐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죽음을 호흡이 멈추는 시점으로 나타내는데 이는 호흡정지와 심폐사가 거의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장기 이식 수술을 위해서 뇌사를 죽음 시점으로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문제는 뇌사 상태였다가 갑자기 의식을 되찾았다는 최근 뉴스처럼 장기 이식을 위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장기를 적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나는 죽음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삶에서 죽음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티베트에서도 사람이 죽은 다음에 한 동안 살아있는 상태가 지속된다고 보고 죽은 이에게 ‘사자의 서’라는 주문(글)을 외어 준다고 한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청각이 가장 늦게까지 작동하기 때문에 듣기 좋은 말을 해줌으로써 죽은 이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죽은 이가 들을 수 있다는 티베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장례식 문화가 3일장, 5일장을 했던 이유도 3~5일 안에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요즘은 사망선고가 떨어지자마자 냉동실에 죽은 이를 집어넣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원천 봉쇄되고 있다.

과거에는 죽음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죽음이 피해야할 질병으로 여겨져서, 아프면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하면 냉동고에 들어가고, 장례식도 대부분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가족들과 친지들, 동네 아는 사람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 안에서 화물 취급을 받는다는 게 서글프다.

100세 시대의 가장 큰 과제인 웰다잉의 해결책은 죽음을 피해야할 질병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에 ‘죽었다’는 표현 대신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도 죽음과 삶이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죽음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과거 우리 조상들도 그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조상이 나이 들어 죽으면 슬퍼하기도 하지만 축제를 벌여서 축하하기도 한다. 죽음이 이처럼 축복의 의미를 지닐 때 웰다잉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죽음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내 삶이 내가 태어나기 이전 세상보다 더 낫도록 만드는 데 기여해야 비로소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11월 23일 게재 칼럼]

동네 뒷산을 오르다가 등산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만 해도 녹색 잎을 자랑하던 나무들이 노랑, 빨강 잎을 매달고 아름다움을 뽐내더니 그마저 내팽개치고 앙상한 가지를 내보이니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밀려온다.


“일 년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은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도 봄과 가을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오지 않을까. 

 

봄은 답답하고 가라앉았던 추운 겨울에서 벗어나 생명이 움트고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좋다는 대답이 많을 것이다. 반면에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더운 여름에서 벗어나 선선해지는 날씨 때문에 좋기도 하지만, 단풍을 볼 수 있는 계절이라 더욱 좋을 것이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주말에 낙엽을 밟으면서 뒷산을 걷다가 문득 나도 이제 서서히 낙엽 신세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잎이 단풍이 들고 결국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이유는 추운 겨울, 즉 죽음이 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나도 인생 후반부에 이미 접어들었는데, 낙엽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되돌아보게 된다.


남자들, 특히 중년 남자들이 가을을 많이 타는 이유는 호르몬 영향도 있겠지만, 퇴직이라는 변화를 겪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퇴직은 사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일하던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녹색의 엽록소를 통해 나무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내던 나뭇잎이 엽록소를 버리고 자신의 고운 색깔을 내보이는 단풍처럼 말이다.


열대우림은 울창하지만 화재가 나서 나무들이 타거나, 벌목을 하게 되면 새로운 숲이 형성되는 데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열대우림에는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사시사철 푸르고 낙엽이 지지 않아 땅에 영양분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대우림에는 비가 많이 내려서 그나마 땅에 조금 남아 있는 유기물을 쓸어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낙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생명의 밑거름으로 변화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 후반부를 맞은 나도 낙엽처럼 아름다움을 보여주다가 결국에는 다른 생명의 밑거름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열대우림의 나무처럼 엽록소를 버리지 못하고 낙엽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내 삶이 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낙엽이 단풍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연륜이라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면서 보는 낙엽은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낙엽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아스팔트 위나 포장된 인도에 떨어져 있는 낙엽은 물 위에 떠있는 기름같이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숲속의 낙엽은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로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아스팔트 위의 낙엽은 치워져야 하는 귀찮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고, 실제로 청소 대상이 된다. 치우고 또 치워도 다시 떨어지는 도시의 낙엽은 청소부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지만, 좋게 보면 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도시의 낙엽과 자연의 낙엽 얘기를 하다 보니 낙엽에 비유되는 우리 인생 후반부도 도시에서의 인생과 자연에서의 인생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보내는 인생 후반부는 아스팔트 위의 낙엽 같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보내는 인생 후반부는 숲 속의 낙엽 같지 않을까. 인생 후반부를 도시에서 보내기보다, 시골의 자연에서 보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낙엽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남자가 퇴직하고 나면 ‘젖은 낙엽 신세’가 된다는 얼마 전 책에서 읽은 얘기가 떠오른다. 젖은 낙엽이 포장된 아스팔트에 눌어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듯이, 남자들이 퇴직하고 나면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비유다. 퇴직하고 치맛자락을 붙잡는 남편들을 아내들이 떼어내려고 하지만, 남편들은 젖은 낙엽처럼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불쌍한 신세가 된다는 비유이리라.

젖은 낙엽의 비유는 원래 일본에서 나온 것인데, 한국 남자들도 점점 비슷한 신세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한국 남자들은 아직까지는 ‘젖은 낙엽’ 신세를 부정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젖은 낙엽 신세가 되지 않고, 숲속의 낙엽처럼 이 세상에 이로운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11월 16일 게재 칼럼]

이제 본격적인 단풍철에 접어들었다. 북쪽에 위치한 설악산부터 시작된 단풍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우리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올해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평년보다 단풍이 드는 시기가 며칠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어쨌든 단풍은 들 것이고, 그 단풍을 보려고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심지어 설악산 오색약수터와 내장산 등 단풍으로 유명한 지역은 주말에 차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로 붐빌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날씨에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를 보고, 그 아래에서 걸으면 정말 기분이 좋다. 봄이나 여름의 초록색 숲도 아름답지만, 단풍에 물든 숲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초록색 숲이야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지만, 단풍은 우리나라와 같이 사계절이 있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으니 더욱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단풍은 추운 겨울로 들어서기 전에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자면 중년기가 가을에 해당한다. 우리 인생은 봄이 유년기, 여름이 청년기, 가을이 중년기, 겨울이 노년기로 비유되곤 한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든 나는 단풍나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러 올 정도로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봄과 여름은 생명이 약동하고, 초록색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는 더위에 그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유년기와 청년기는 부모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중년기에 접어들어 초록색 잎이 바래고, 무성했던 나뭇잎이 떨어지면 가는 세월을 원망하면서 젊음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한탄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도 단풍처럼 중년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곤 한다. 단풍처럼 아름다운 중년을 맞이하려면 중년과 단풍의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풍은 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때가 오면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을 저절로 드러낸다. 봄과 여름에 광합성을 위해 필요했던 엽록소의 초록에 묻혀있던 색소들이, 가을로 접어들어 광합성이 필요 없어지면서 엽록소가 사라지자 감춰졌던 색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단풍이다. 봄과 여름에 숨겨져 있던 색소들이 어떤 성분이냐에 따라 단풍의 색깔이 정해지게 된다. 이처럼 단풍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중년을 맞이하여 아름다움을 뽐내려면 스스로 자신 안의 숨겨진 색깔을 찾아내고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유년기와 청년기에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자신만의 특성을 가꾸어야 한다. 또 이런 노력은 중년기에 들어서서도 계속 되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중년들이 성장의 패러다임에 매몰되어 자신 안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중년의 아름다움을 뽐낼 기회를 날려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계절의 섭리를 이길 수는 없다. 아무리 봄, 여름이 좋고 가을이 싫다고 해도 가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젊음이 좋고 나이 드는 게 싫다고 해도 나이는 꼬박꼬박 들게 마련이다. 아마도 가장 현명한 길은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에 맞춰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리라. 단풍나무처럼.

나도 ‘단풍나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 정도로 아름다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나도 평범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지만, 혹시 중년기에 접어든 지금 비로소 내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러려면 세상을 향해, 젊은이들을 향해 나한테 다가오라고 잔소리를 할 게 아니라, 은은한 아름다움을 풍겨서 저절로 나에게 다가오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단풍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모여들게 만들듯이 말이다.

이제부터 중년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세상을 유혹해 보아야겠다. 곁에 서서 사진을 마구 찍어대는 젊은이들을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단풍나무의 모습처럼 중년을 살아가야겠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10월 26일=류수근 기자]

[김송호의 과학단상]㉖ 물의 신비

2022. 7. 6. 07:00 | Posted by 행복 기술자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으로는 공기와 물 그리고 음식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공기, 물, 음식도 견딜 수 있는 기간에는 차이가 있다. 공기가 없으면 3분 동안, 물이 없으면 3일 동안, 음식이 없으면 3주 동안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기, 물, 음식의 존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의 질도 중요하다. 요즘 미세 먼지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고,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는 뉴스는 공기 질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넘쳐나고 있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또 요즘은 건강을 위해 수돗물이 아닌 생수를 마시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물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몸의 60~80퍼센트가 물이고, 혈액의 94퍼센트가 물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현상이 대부분 물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물이 우리 생존에 필수 요소가 된다.

물은 우리 건강에 중요한 요소지만, 자연에도 꼭 필요한 요소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식물과 동물의 생존에 물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 잠자듯 시들었던 식물이 봄에 다시 자라나고,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에 다시 시드는 것도 물의 형태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겨울에는 물이 얼음 형태로 변하기 때문에 식물이 이용할 수 없지만, 봄이 되면 물로 변하기 때문에 식물이 이용할 수 있게 되어 다시 생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물이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녹는 것 자체가 신비라고 볼 수도 있다. 겨울에는 식물들이 생장을 멈추기 때문에 물이 필요 없다가 봄이 되면 비로소 물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겨울에 그냥 흘려 내려갈 물이 얼음 형태로 바뀌어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봄에 식물에게 필요한 물로 바뀌는 것은 크나큰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봄철이 되어 산길을 걷다가 얼음이 녹아 길이 질척거리더라도 너무 불평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물과 얼음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생각나는 물의 신비가 또 한 가지 있다. 물리학 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대부분의 고체는 액체보다 비중이 높다. 즉 고체를 같은 성분의 액체에 넣으면 가라앉게 된다. 그런데 얼음은 물에 뜬다. 얼음이 물보다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얼음의 형태인 빙산이 바닷물에 떠다니는 것을 연상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왜 신비라고까지 얘기를 할까? 만약 얼음이 물보다 비중이 높으면 생명체에는 치명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서 모두 물밑으로 가라앉으면 물에 사는 생물들은 살 공간이 없게 된다. 그런데 얼음이 위로 뜨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물속의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물 위부터 얼음이 얼기 때문에 물속은 얼음이 얼지 않아서 물고기들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물의 신비로는 물의 에너지 저장 능력이다. 물은 수증기로 변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된다. 그러니 태양으로부터 받는 에너지의 일부를 수증기라는 형태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바다로 흘러내려가서 낮은 (위치) 에너지를 갖게 된 물이 다시 산꼭대기나 강의 상류로 순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의 에너지 저장 능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태풍이다. 적도의 뜨거운 열, 즉 에너지를 받아 축적된 수증기가 태양 에너지를 덜 받은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바로 태풍이다. 그러니까 지구의 남과 북에 불균형하게 내리쬐는 태양 에너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태풍인 것이다.

겨울철의 눈이나 얼음이 됐든, 태풍이 됐든 인간의 좁은 안목으로는 불편한 현상이 사실은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위한 신비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줄어들지 않을까?

더구나 이런 물의 신비를 생각하다보면 이 세상이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정밀하게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설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인지, 유대교에서 말하는 야훼인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알라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니면 인격적인 신이 아닌 자연의 신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이 위대한 자연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건 아닌지 물의 신비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된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10월 12일]

얼마 전 태풍 ‘찬투’가 남해안으로 지나가면서 많은 비와 강한 비바람을 뿌렸다. 태풍으로 인해 가옥이 침수되고, 농작물이 물에 잠기고, 추수를 앞둔 과일들이 많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민들의 피해도 심하고, 덩달아 농작물 가격도 오르고 있다.

추석을 전후해서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태풍이 많이 오면서 결실을 앞둔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주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름부터 가을까지 우리에게 찾아오는 태풍은 불필요한 존재일까? 자연에는 불필요한 존재란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태풍은 자연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게 꼭 필요하다. 지구의 70퍼센트 정도가 물이고, 인체의 60∼80퍼센트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경우에 모든 생체 반응은 물을 통해서 일어난다. 음식은 먹지 못해도 몇 주를 버틸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며칠을 견디기 힘들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이렇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은 처음에는 산과 들에 비의 형태로 내린다. 빗방울들이 모여서 시내를 이루고,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큰 강에 이르러서는 느릿하게 흘러간다. 과학적인 용어인 엔트로피 개념으로 보자면 높은 에너지(낮은 엔트로피) 형태에서 점차 낮은 에너지(높은 엔트로피) 형태로 변해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멈추게 된다.

바다에 이른 물은 더 이상 자력으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닷물은 가장 낮은 에너지 형태, 즉 엔트로피가 최대이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움직이는 경우는 바람에 의해 일렁일 때나 햇볕에 의해 증발될 때다. 햇볕에 의해 증발된 물은 다시 가장 높은 에너지 형태, 즉 엔트로피가 낮아지게 된다. 이게 바로 구름이고, 그 구름이 비 형태로 지상에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태풍은 이런 현상이 광범위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도 지방에 내려쬐는 강력한 햇볕에 의해 증발된 수증기 형태의 에너지가 햇볕이 덜 내리쬐고 비가 부족한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지구 전체적으로 보아 에너지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수단이 바로 태풍인 것이다. 즉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군데 뭉친 에너지를 빨리 분산시키기 위해 태풍의 형태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태풍은 단순히 에너지만 이동하고, 북쪽 지방의 부족한 물을 공급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다를 한 번 뒤집어서 정화(?)하는 작용도 한다. 좋게 보자면 약한 나무들을 쓰러뜨려서 솎아주는 작용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천 밑바닥에 쌓인 오물들도 쓸어내리고, 나무를 흔들어 주어서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태풍은 우리의 욕심과도 비교할 수 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구름과 비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 계속 욕심을 채우다보면 언젠가는 그게 쌓여서 태풍처럼 터지게 된다. 마치 태풍이 뭉친 에너지를 골고루 배분하기 위해 몰아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인생을 물과 비유하자면 인생 초기에는 골짜기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과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요란하게 흐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인생 후반부에 들어서면 흐르는 강물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 후반부에도 골짜기에 흐르는 물처럼 요란하게 살고자 한다. 모든 걸 껴안고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되기를 거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요란한 골짜기 물보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강물이 실제로는 힘이 더 세다는 사실을 모르고 말이다. 실제로 전기를 생산하는 댐은 골짜기에 짓지 않고, 넓은 강물을 막아서 짓지 않는가?

이제 인생 후반부에는 내어주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살도록 하자.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을 관조하며 살도록 하자. 자신을 뜨거운 햇볕에 내주어 다시 구름이 되는 순환의 고리가 연결되도록 하자. 바람에 일렁이면서 모든 걸 포용하는 바다가 되도록 노력하자.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9월 28일]

벌써 2021년도 반이 지나 이제 몇 달 없으면 연말이 될 것이다. 연초에는 “어, 어, 벌써 2021년이네. 세월이 왜 이렇게 빠르게 흐르지?”라고 생각했는데, 2021년도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21세기가 된다고 아우성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1년도 지나고 이제 며칠 있으면 2022년이 된다.

나이 들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세월이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구체적으로 세월이 흐르는 속도가 나이 곱하기 2라는 공식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즉 나이 20에는 세월이 시속 40킬로미터로 천천히 흐르지만, 60대가 되면 120킬로미터로 엄청나게 빨리 흐른다는 것이다.

나이 50이 넘으면 마치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으로 달리면서 눈 깜빡할 사이에 풍경이 뒤로 밀려가듯이 세월이 화살 같이 빨리 흘러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왜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느냐?”고 느끼고 있다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나도 언제부터인가 세월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에 몇 년 전에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코리브르, 2005년)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이유를 여러 심리학 이론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특히 공감한 내용은 나이가 들면서 일상적인 삶이 반복되기 때문에 하루는 느리지만 1년은 빨리 가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난 날짜를 기억하려고 할 때 어떤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억하게 된다. 따라서 어릴 때는 기억에 남는 큰 사건이 자주 일어나서 세월의 간격이 좁아지지만, 나이가 들면 큰일이라는 것이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세월을 기억하는 표지판이 듬성듬성 있어서 상대적으로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어릴 때는 주먹이 작기 때문에 과자를 조금만 줘도 과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라서 주먹이 커지면 같은 양의 과자를 받아도 과자가 적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니면 어릴 때 크게 느껴지던 학교 운동장이 커서 가보면 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에는 새로운 학년이 되어서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 방학을 하고, 키도 부쩍부쩍 크게 된다. 그만큼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하루하루의 일상이 반복되고, 나이가 들어서 퇴직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판박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하루하루는 지루하고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끼지만, 한 달, 한 해는 금방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게 되면 몸도 마음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는 사실이다. 명상을 통해 천천히 호흡을 하면 수명이 길어지듯이, 세월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끼게 되면 몸과 마음의 노화 속도도 느려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세월을 느리게 가게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일, 가슴 뛰는 일을 만들어 반복적인 일상이 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몸에 익숙했다고 이제까지 하던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할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찾아 도전해 보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는 중간 중간에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는 큰 사건들을 만들어서 세월이 잠시 멈춰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면 세월이 더디 흐르게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좁은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가듯 모든 게 소란스럽고 작은 사건들도 크게 보여 지지만 나이가 들면 큰 강물이 느릿느릿 흐르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이 저만큼 가고 있는 걸 나중에야 느끼게 된다. 그러니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만들면 세월이 잠시 멈추었다 가지 않을까?


그런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실행하고 있는 두 가지 방법만 소개고자 한다.


첫째,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낯선 곳에 여행을 하는 것인데, 패키지여행보다는 배낭여행이 낫다. 좋은 경치보고 여럿이 어울려서 술 마시는 기존 여행 방식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요즘 해외여행은 갈 수 없지만, 남해안과 서해안에 있는 섬들을 여행하면서 경치와 음식, 문화 등을 느끼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다.

둘째,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특히 모임을 통해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춤, 요가, 악기 등을 배우는 노력을 하다 보면 뇌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큰 소용돌이를 만들 것이다. 이런 노력은 단순히 퇴직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9월 17일]

과학과 종교에 대해서 논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진화론 대 창조론’ 논쟁이다.

사실 과학과 종교의 대결(?)에서 과학에 결정적인 우위를 안겨준 것도 바로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동설 등 천체물리학의 부상이 과학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동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진화론과 창조론이 과학과 종교의 대결에서 큰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틀림없는 과학적 사실일까? 물론 성서 내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한다면 진화론이 더 과학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화론 그 자체가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성서 글자 그대로의 창조론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진화론이 과학적이라고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창조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많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진화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초의 생명 탄생의 비밀, 다른 종으로의 진화 등은 아직 확실한 과학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진화론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진화론이 완벽하게 과학적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연구결과가 그 연구를 진행하는 데 연구비 지원을 해준 연구기관 등의 외부적 여건에 의해 과학적 사실에 왜곡될 수 있듯이,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과학적 사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하는데, 진화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과학의 발전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역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과학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다윈이 진화론을 제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윈의 진화론이 각광을 받게 된 가장 큰 요인도 당시 등장하기 시작한 자본가들에게 진화론이 유리한 이론적 배경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 특히 당시 위세를 떨치던 가톨릭의 교리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성경구절처럼 부가 죄악시되었다. 그만큼 부를 추구하는 자본가들은 알게 모르게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화론에 의해 적자생존이 자연스런 현상으로 부각되면서 부의 축적은 적자생존에서 승자가 차지하는 당연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낙오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스펜서 등의 견해가 종교 지도자 및 기업가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는 새로 부국이 된 미국의 기업가 정신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부의 크기가 적자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척도라는 과학적 뒷받침을 등에 업은 스펜서의 구호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적자생존 원칙을 사회제도에 적용하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잘못된 진화론적 주장을 내세워 무절제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하고 있다. 글로벌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한 세계화가 마치 진화론에 의한 적자생존의 시장 원리를 원용한 합리적 원칙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적자생존에 의해 자연계가 균형을 유지하듯이, 자유방임 경제, 규제 없는 자본주의 등과 같은 원칙이 정당화되고 있다.

또한 진화론적 사고를 가진 19세기 인류학자와 생물학자들은 진화와 진보를 혼동한 나머지, 적자생존의 개념을 인간 사회의 진화에 적용하여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진화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우생학, 나치즘, 인종주의적 이민정책, 장애우 등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로 진화론적 주장이 이용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진화론은 식민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진화(문명화)된 민족이 덜 진화된 민족(야만인)을 정복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이 부당한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화론이 악용되는 것을 보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항거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여기에 제기된 주장에 반감을 느낀다면 알게 모르게 자본가들이 앞세운 진화론적 논리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송호 과학칼럼니스트]

■ 칼럼니스트 소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Purdue)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한국공학교육인증원 감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로 활동 중이다. 과학 기술의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아 5000여 명에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써서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고 약 20권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AI 공존 패러다임’,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다’, ‘행복하게 나이 들기’, ‘당신의 미래에 취업하라’, ‘신재생 에너지 기술 및 시장 분석’ 등이 있다.

 

[메가경제 2021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