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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과 더불어 인생 후반기를 맞아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자의 변신 스토리입니다. --------- 기술 자문(건설 소재, 재활용), 강연 및 글(칼럼, 기고문) 요청은 010-6358-0057 또는 tiger_ceo@naver.com으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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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는 26개 코스 425㎞의 장거리 트레일이다. 코스 대부분이 해안을 끼고 돈다. 그래서 제주올레는 겨울에 걷기 어렵다고 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다. 겨울이어도 좋은 올레길을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에게 물었다. 서 이사장의 추천사를 옮긴다.

 

위미동백나무 군락지의 동백나무 [사진 ㈔제주올레]


어디에서도 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막막한 계절에 강렬한 색깔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제주다. 특히 제주올레 5코스는 동백꽃 깔린 자연 카펫을 밟으며 걸을 수 있어 제철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제주올레 5코스는 제주에서 가장 따뜻하고 귤 맛이 좋기로 소문난 남원과 위미를 지난다. 남원포구에서 시작해 쇠소깍까지 14.4㎞가 이어진다. 오름이나 자갈길이 없어 초보자나 어린이·노약자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바로 이맘때 5코스에 붉은 카펫이 깔린다. 1~2월이면 위미리 일대에 마을 울타리와 감귤밭 방풍림으로 심은 동백나무에서 꽃이 만개한다. ‘위미동백나무 군락지’에서 붉은 색이 더욱 강렬해진다. 이 군락지는 17세 나이에 시집 온 현맹춘 할머니가 해초를 캐고 품팔이를 하여 평생 모은 돈 35냥으로 가꾼 땅이다. 높이 10∼12m 둘레 20∼35m의 동백나무 군락이 겨울이면 장관을 이룬다.

 

쇠소깍 풍경. 투명 카누가 노닐고 제주 전통 배 태우가 떠다닌다. 제주올레가 뜬 뒤 관광명소로 뜬 하효마을 쇠소깍에 있다. [손민호 기자]


5코스의 끝이자 6코스의 시작이 쇠소깍이다. 원래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 하여 쇠둔이라 불렀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 소나무숲이 이루는 조화도 아름답지만,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에메랄드 물빛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쇠소깍이 있는 효돈(하효마을)에서 마을 사업으로 제주 전통 배 테우와 투명 카약 등을 운영한다. 테우: 064-732-9998, 투명카약: 010-6417-1617.

(중앙일보 2015년 1월 23일 손민호 기자)

운이 좋았다. 주목을 보고 싶어 태백산에 들었다가 장엄한 일출을 마주했다. 이미 죽은 주목이 새벽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다. 휘어지고 굽은 모양이 허구한 날 치이는 우리네 삶을 닮았다. 사진=안성식 기자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문득, 겨울 산이 그리웠다.

누군가 겨울 산은 황량하다고 했다. 겨울산에는 아무것도 없어 허한 가슴에 찬 바람만 불어온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잎사귀 우거진 여름 날의 산을 생각했던 것 같다.

겨울 산이 그리운 건, 겨울 나무가 사무쳐서였다. 한 사진작가는 겨울 산에 들어가야 나무가 보인다고 했다. 잎사귀 떨어내고 알몸이 된 나무가 자신을 닮은 것 같아 눈에 밟힌다고 했다. 풍진 세상에 맨몸으로 맞서는 제 신세가 강마른 겨울 나무에서 얼비친다고 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글귀에 밑줄을 친 적이 있다. 작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를 조망하라는 가르침으로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한 그루 나무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숲에 들어서도 나무의 거친 껍질을 어루만진다. 전체로 뭉뚱그려지는 세상이 이제는 싫다.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곁을 떠났다. 나이를 먹는 건, 혼자 남는 것이었다.

나무는 이미 하나의 전체다. 거대한 세상이고, 신성한 말씀이다. 나무 한 그루가 들려주는 먼 시간을 우리네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나무 한 그루의 우주도 나에겐 벅차다.

겨울이 깊으면 늘 푸른 소나무도 생각나고, 붉은 꽃잎 터뜨리는 동백나무도 생각난다. 하나 눈 덮인 겨울 산을 올라 기어이 마주해야 하는 나무는 따로 있다.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 주목과, 허연 알몸으로 겨울에 맞서는 자작나무다. 두 나무 모두 거친 숨 몰아쉬며 겨울을 상대한 다음에야 조우할 수 있다.

주목이 가로의 나무라면, 자작나무는 세로의 나무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은 겨울 바람에 떠밀려 제 몸을 비틀고 서 있다.

길게 누운 가지 위에 겨울이면 이 쌓이고 서리가 얹힌다. 그렇게 제 몸을 고 휘어서 주목은 천 년 세월을 견딘다.

자작나무는 길고 정갈한 모양으로 하늘만 한다. 잎사귀를 버리는 것도 모자라 곁가지도 스스로 끊어내고 겨울을 난다. 벌(罰)서는 처럼 그렇게 순수한 수직선으로 서서 북방의 혹독한 겨울을 감내한다. 순전히 하얘서, 눈 덮인 겨울에 더 도드라진다.

나무 아래에 앉아 봤으면 안다. 나무 아래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간다. 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속상했던 일, 서러웠던 일, 배고팠던 일 한참이나 지울 수 있다. 온갖 투정 다 부려도 나무는 오랜 친구처럼 잠자코 귀를 기울인다. 나이를 제 몸에 새기듯이, 나무는 우리의 울분도 제 몸에 담아둔다. 이따금 가지를 흔들어 고개만 끄덕인다. 나무를 만나고 오면, 한 계절 살아낼 힘을 얻는다.

팔순의 시인이 자작나무 숲을 갔다와서 노래했다. 겨울 나무만이 타락을 모른다. 비단 늙은 시인에게만 험한 계절 버티고 선 나무가 티 없이 맑아 보인 건 아니었다. 그래, 나이 먹어도 더럽지는 말자. 늙어도 썩지는 말자. 나무처럼 살자. 나무처럼 늙자.

겨울 나무를 보고 왔다. 이제 나이에 관한한은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중앙일보 2015년 1월 30일 손민호 기자)

행복한 엔지니어의 뉴스레터 (제 313 호)

 

【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말 중의 하나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르코복음 12:31, 마태복음 22:39)”는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이웃도 제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 대해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하느님이 인간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텐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이웃을 제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제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권유했다는 점입니다.

제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게 더 큰 사랑일 것 같은데, 제 자신처럼만 사랑하라고 하니 이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사랑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것이기 때문에 평등과 일치가 있는 곳이 아니면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죽이고 무조건적으로 굴종을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진정한 의미는 나와 내 이웃이, 또 하느님과도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하느님)은 만물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신 큰 두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과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같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내가 하나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나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과 인간 이외의 만물도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만물도 사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만물을 누리되, 만물을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어느 한 피조물을 다른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문을 활짝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느님은 자신을 그들 속에 쏟아 부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권고는 우리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 말씀이나,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부처의 가르침도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인드라망 사상도 결국 같은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나를 만물과 분리시키는 이분법적인 사고야말로 다른 존재 및 하느님과의 합일을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근본 원인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사랑해야할 나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성주의자 엑카르트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피조물과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하느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요한1서 4:16).”라는 성서의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사랑을 하려면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나눠줄 게 아니라, 내 것이 곧 네 것이요, 하느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 내놓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어설프게 깨달은 사이비 성직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것들을 자신들이 차지하는 죄악을 저질러서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제 이웃과 하느님을 제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만드는 기술자

 

김송호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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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발송되었던 뉴스레터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제 개인 블로그 http://happyengineer.tistory.com/의 <주간 뉴스레터>나 http://www.linknow.kr/group/happygroup의 <행복한 엔지니어의 뉴스레터> 목록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본 주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저에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글을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