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하 곳곳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나는 특히 전라남도 지방을 좋아한다. 나에게 전라남도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를 대라고 그러면 딱히 뭐라고 답할 수는 없지만, 뭐라고 그럴까 그냥 푸근한 느낌이 들어서라고 그럴까. 나는 여행을 좋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전라남도에 가면 왠지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물론 나는 제주도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는 거의 서울에서 살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강원도 삼척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고 7년여를 살았기 때문에 강원도에 대한 추억도 많은 편이긴 하다. 또 5살적부터 12살 때까지 7년 동안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살았다. 거기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느라고 4년 동안을 살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전국구다. 아니 미국까지 포함하면 세계시민(?)이다. 현재까지 내 평생 56년 동안 제주도에서 11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7년, 강원도 삼척에서 7년, 미국에서 4년, 서울에서 26년을 살았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다시 어디엔가 농촌으로 내려간다. 전에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이 내게 역마살이 끼어 있다고 하더니 딱 그대로다. 하긴 내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정적이라 어디 다니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나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각설하고 내가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고향이 제주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라남도가 내 마음을 가장 많이 끈다. 그건 내가 어릴 적에 진도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너른 평야지대를 가진 전라남도 농촌의 풍요와 그에 따른 후한 인심, 그리고 문화적인 분위기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스님들도 모두 전라남도에 있고, 여행을 가서 사귄 사람들 중에서도 왠지 오래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라남도에 있다. 여행을 가서 저녁에 술을 마셔도 전라남도의 술집 분위기는 뭔가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술집 자체도 예술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경우가 많고, 어울려서 술을 마시다보면 일행 중의 누군가가 자신의 친구를 끌어들여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전부터 친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든다.
전라남도가 내 마음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잔잔한 바다에 널려있는 섬들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어린 시절 진도에서 살았을 적에 봤던 아스라한 바다 풍경들과 겹치면서 내 잠재의식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움이 바로 섬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집을 벗어나서 멀리 있는 다른 섬에는 가보지 못했었지만, 마음속에는 앞에 보이는 섬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잠재의식이 자리 잡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바닷가에 가면 뭔가 먹을거리도 있고, 재미있게 놀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친구와 같은 존재로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물론 제주도도 섬이고, 바다에 가서 놀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의 바다는 어린 아이가 놀기에는 너무 깊고, 집에서도 멀고, 먹을거리도 그리 많이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도의 바다는 그저 멀리 바라보는 존재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서 제주도의 맑은 바다를 보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래서 가끔 제주도 바다가 그리운데, 제주도에 갈 형편이 안 되면 강원도 삼척의 바다에 가서 제주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전라남도 섬들에 대한 애정이 점점 더 커지는 이유는 아마도 제주도의 맑은 바다의 느낌도 들면서 가까이서 풍요를 제공하는 푸근한 어머니의 품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 바다나 강원도의 바다는 가끔은 그립지만, 계속 가까이 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면, 남해에 있는 바다는 언제든지 나를 반겨주고 품에 안아줄 것 같은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나 비유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여행을 가서 머무르고 싶은 섬들은 제주도나 을릉도, 혹은 홍도와 같이 멀리 있는 섬이 아니라, 육지와 가까이 있으면서 삶의 터전을 삼을 수 있는 섬들이다. 또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는 서해안의 섬들보다는 갯벌과 맑은 바다를 동시에 갖고 있는 남해안의 섬들을 여행하고 싶다. 하긴 그 동안 남해안의 몇 개 섬들을 여행하긴 했다. 배를 타고 가는 섬들은 별로 가보지 못했지만, 육지와 다리로 이어져서 섬이라고 볼 수도 있는 완도와 진도는 이미 몇 차례 다녀왔다. 진도는 내가 살던 곳이라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함에 다녀왔고, 완도는 그냥 구경삼아서 다녀왔다.
전라남도 섬들에 대한 나의 막연한 그리움에 불을 댕긴 것은 남도여행에서 만난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강신겸 교수의 강연이었다. 강신겸 교수는 전라남도에 있는 섬들을 대상으로 섬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강 교수의 섬여행 철학은 단순 관광이 아니라, 섬에 머무르면서 섬의 생활을 체험하자는 것이다. 그냥 섬에 들러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맛있는 회를 먹고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섬에 머물면서 바다의 삶도 체험하고, 바다에서 사는 섬사람들의 생활도 느껴보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돈도 여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얼른 들렀다가 증명사진 찍고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여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긴 이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럴 정도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나도 아직까지 그런 머무는 여행을 하면 마음이 불편한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 나는 섬의 바닷가가 제공하는 먹을거리들도 채취하고 싶고,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도 들고 싶다. 그러려면 하루 이틀 머무는 관광이 아니라, 며칠을 지내다 갈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섬 여행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나의 행복도 내 주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섬들을 가고 싶은가? 물론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청산도, 고금도, 관매도, 비금도, 선유도 등도 가고 싶다. 하지만 정말 가고 싶은 섬들은 관광 온 도시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고, 섬사람들과 아울려서 몇 날 며칠을 거기 생활에 푹 빠질 수 있는 그런 섬 여행을 하고 싶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전라남도 영광 앞에 있는 송이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섬에도 육지 사람들이 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며칠을 머무른다면 섬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 때는 아침에 갔다가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저녁에 나오고 말았지만,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청산도, 고금도 등 유명한 섬들이라고 해서 섬 여행을 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많이 가는 여름 휴가철이나 주말을 피해서 간다면 나름대로 그 섬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추진하고 있는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를 이런 섬에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고, 검토는 계속 하고 있다. 섬에 공동체를 만들게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부족할 염려가 있고, 섬사람들의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를 여럿 만들게 되면 섬에 하나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초기에는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를 섬에 만들지 않더라도, 가능하면 바다가 가깝고, 가까이에 섬이 있는 장소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나의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대로라면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가 자리 잡을 장소의 조건으로는 따뜻해야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너른 땅(특히 밭)도 있어야 하고, 산도 있어야 하고, 바다도 가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한꺼번에 모두 갖춘 곳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나의 자유이지 않은가. 만약 한 곳이 이런 모든 조건을 한꺼번에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를 여럿 만들 때 이런 조건들을 일부 만족시키도록 하면 결국 모두 만족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한 곳에서 만족시키지 못하는 조건은 다른 곳에서 보완을 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나의 섬 여행은 내 일생 동안 꾸준히 실행하고 싶은 꿈이다. 올해부터라도 한 곳부터 일단 시작을 하고, 매년 그 횟수를 늘려가려고 한다. 또 나중에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에서 살게 되더라도 틈틈이 시간이 날 때 섬 여행을 계속 할 생각이다. 어쩌면 섬 여행은 행복한 시니어 공동체를 실현할 장소를 찾는 작업과도 연결이 될 수도 있고, 그냥 내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섬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내가 슬로 라이프를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쁘게 돌아가야만 마음이 놓이던 내 생활습관이 바뀌어서 슬로 라이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글도 어느 섬의 허름한 방에서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 쓰는 글은 이런 딱딱한 글이 아니라, 감성이 묻어나는 시가 될지도 모르겠다.